철원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미·중·일·러 등 5개국 활동
재미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신한민보’ 주필·‘군인수지’ 발간
다방면 지도력 발휘
완전 독립된 민주국가 추구
사후 노모·부인 철원 귀향

▲ 박용만 선생 모습.
▲ 박용만 선생 모습.
해외 항일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재미 한인소년병학교’라던가 이 학교를 창설한 군모와 군복 차림에 칼을 찬 훤칠한 젊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구해볼 수 있다.그 사진의 주인공이 강원도 철원 출신 ‘박용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박용만(1881.7.2~1928.10.17)은 류인석,민긍호,이은찬과 함께 강원도 출신으로는 최고 등급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지만 그동안 강원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기념사업조차 없이 잊힌 인물이었다.

지난 17일 박용만이 서거한 지 90주년을 맞아 강원도에서 첫 추모제가 생가터인 철원군 월하삼거리 포병대대에서 봉행됐다.

국화꽃에 둘러싸인 박용만 영정을 포병대대 연병장 추모공간에 안치한 것을 시작으로 추모사 낭독,‘칼의 길’ 연극,생가터 표지목 설치,만세 삼창에 이르기까지 참석한 이들을 숙연케했다.

박용만의 생가는 원래 철원읍 밀양박씨 집성촌에 자리 잡았으나 현재 집의 흔적도 없이 군부대로 쓰이고 있어 줄기차게 무장투쟁을 추구한 박용만의 생애와 맞물려 생가마저 군에 내준 특별한 사연은 참석자들에 애틋하면서도 착잡한 감회를 안겼다.

▲ 1924년 작성된 판결문의 박용만 생가는 철원군 철원면 109번지로 현 포병부대 내에 생가터 표지목을 설치했다.
▲ 1924년 작성된 판결문의 박용만 생가는 철원군 철원면 109번지로 현 포병부대 내에 생가터 표지목을 설치했다.
국가기록원의 관련 사료를 통한 생가터 규명을 바탕으로 첫 추모행사를 마련한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이소진) 회원을 비롯 철원지역사회 기관단체장,이종호 광복회 강원도지부장,김원범 춘천연합지회장,손상혁 포병연대장,한애라 박용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철원고·철원여고 재학생,포병대대 현역군인 등 전원은 헌화로 고향에 돌아온 박용만을 기렸다.

▲ 박용만 선생
▲ 박용만 선생
박용만은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한 기독교인이며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 선각자로 재미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를 이끌며 냉엄한 국제관계 인식 아래 1909년 6월 미국 네브래스카에 해외 첫 독립군 양성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1918년의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만세운동 때는 하와이에 있으면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배포했다.1919년 상해 임시정부와 한성정부,이후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박용만은 모두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될 정도로 독립운동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1919년 8월쯤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조선국민군’ 확장을 추진했으며 1921년 4월 중국 북경에서는 무장투쟁단체를 통합하는 ‘군사통일회의’협의체를 추진했다.성과를 보지 못하자 중국에서 ‘둔전병제’를 도모하는 등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완전 독립된 조선을 부르짖으며 군사 방면 이외에 교육,언론,경제,저술,연설 등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다 1928년 중국 북경에서 동족의 총격으로 안타까운 생애를 마쳤다.

▲ 포병부대에 마련된 추모제에 안치된 박용만선생 영정
▲ 포병부대에 마련된 추모제에 안치된 박용만선생 영정
일제강점 이전 ‘제국신문’에 기고를 비롯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호놀룰루의‘국민보’,북경의 ‘대동’,천진의 ‘혁신공보’ 등의 주필을 맡아 활동했으며 1917년 세계 24~25개 약소국 민족대표들이 참가한 소약국민동맹회의에서 한국 독립 지지를 호소하는 명연설을 했다.‘국민개병제’와 ‘국민징세제’를 비롯 임시정부의 개념과 같은 무형의 정부 설립을 주장하는 등 개혁적인 사상을 주창했다.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도 상동청년회,만민공동회,보안회에 적극 참여해 반일 활동으로 여러 번 수감됐다.

미국 위임통치안을 제출하고 하와이 군사학교를 공격한 이승만과 극렬 대립하고 임시정부 외무총작직도 사임한데다 죽음의 배경을 둘러싼 이견으로 박용만은 광복 직후 조명되지 못한 채 뒤늦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고향 철원에 기념비나 조형물 조차 없는 상태이나 1925년 7월 1일 발간된 ‘개벽’지 기사 ‘팔도대표의 팔도자랑’ 중 강원도 대표 인물로 ‘박용만 지사’를 첫 손에 꼽을 정도로 저명했다.박용만의 미국 유학을 주선한 숙부 박희병은 ‘해외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데 북미 대한인애국동지대표자 대회를 준비하다가 병사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위 이용화는 건국훈장 애국장, 대한독립애국단 군단 창설에 기여한 당숙 박건병은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됐으며 일가 박용각(애국장) 박용철(애국장)이 애국지사로 활동했다.

한편 사후 북경에 남아있던 가족은 일본 고등경찰로부터 삼엄한 감시를 당한 것으로 본보 취재 결과 드러났다.

▲ 매일신보 1929년 3월 27일자 박용만 유족 입국관련 기사
▲ 매일신보 1929년 3월 27일자 박용만 유족 입국관련 기사
매일신보 1929년 3월 27일자 5면 ‘박용만의 유족 귀환’ ‘인천에 상륙해 강원도 철원에’ 제하 기사에 박용만의 80세 노모와 부인이 중국에서 귀국해 고향 철원으로 돌아갈 때 고등경찰로부터 장시간 취조를 당하는 고통과 수모를 겪은 것. 신문에 ‘상해 가정부(임시정부) 박용만이가 작년 가을 북평(북경)에서 횡사하얏슴으로 그의 노모 김씨(80)와 처 전씨(42) 양인은 24일 입항 공동환으로 인천에 상륙하얏는데 인천서에서는 즉시 본서로 소환하야 증근 고등계 주임이 극비밀리에 장시간 취조를 하고 곳 미행을 부처서 강원도 철원군 동문 외 중리 그들의 향리로 보내엿다더라’고 보도되었다.

최근 독립운동가 남편이나 아들의 명성에 가려졌던 여성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박용만 뿐 아니라 사후에 요주의인물로 감시가 따랐던 이들 어머니와 부인의 삶에 대한 조명도 요청된다. 박미현· 안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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