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주 경기 저동고 2년

“보지만 말고 입어보세요.”

인상 좋은 점원은 엄마에게 다가온다.무엇이 찔려서일까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뻐끔거린다.그냥 한 번 보는 거에요.엄마의 말은 행동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벌써 가게 앞에서 속옷을 보길 십여 분.속옷을 올렸다 내리기만을 반복하는 엄마다.모처럼 나온 둘만의 시내 구경이었다.하지만 속옷가게에서 발목을 붙잡히다니.나는 답답함에 엄마를 보챘다.“이제 가자,볼만큼 봤잖아.”엄마 역시 내 말을 듣곤 속옷을 내려놓는다.새로 나온 신상 속옷이 걸렸던 걸까.가는길에도 속옷가게 쪽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엄마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들렸다.내 앞에서 커다란 버스킹을 하고 있어서일까.나는 당시 그 작은 읊조림을 흘려듣기만 했다.현관문에서 쩌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엄마가 요새 빠진 드라마 소리였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함이 날 반겼다.“도대체 내 친딸이 누군데!”꿀꺽.긴장이 고조되는 순간,광고가 나왔다.긴장이 풀려서일까.다리 역시 맥없이 풀렸다.엄마와 함께 비스듬히 소파에 기댔다.앞으로 두 시간은 일어나지 않겠다는 얘기다.

“엄마,오늘 저녁 뭐야?” 배고픔에 속이 쓰렸던 나는 메뉴를 물었다.밥 시간이 되면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질문이다.하지만 그 질문은 엄마의 감정선에 정곡을 찔렀다.“도대체 언제까지 차려줘야 되는데? 그 나이 먹도록 밥 짓는 법도 몰라?”

분노는 엄마의 목청을 붓게 만들었다.목감기에 걸린 듯 부은 성대로 소리를 지르는 엄마였다.오리의 꽥꽥거림 같은 호통은 나를 더 억울하게 만들었다.나 역시 지지 않고 대들었다.“학교 갖다 온 딸에게 밥 차려주는게 그렇게 억울해?” 씩씩거리며 엄마를 쳐다봤다.나는 차가운 비수를 꽂은 채 방으로 갔다.땅거미가 내린 창문은 얘기했다.엄마에게 저녁 인사를 하라고.나는 지체 없이 안방으로 갔다.아까 전 엄마에게 한 차가운 얘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굳게 닫힌 문에 조금의 틈을 냈다.틈 사이론 엄마가 보였다.엄마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엄마의 손끝을 보지 못 했다면,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순간 시야가 흔들렸다.내 눈에 들어온 건 엄마의 분홍 속옷이었다.엄마는 속옷을 들고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있었다.분홍색깔의 속옷은 자세히 보니 대칭이 맞지 않았다.한 쪽은 주름이 졌지만 한 쪽은 새 거와도 같았다.엄만 혼자서 중얼거렸다.속옷마저 두 가슴을 가지고 있는데,나는….떨리는 눈으로 엄마를 쳐다봤다.엄마의 가슴 한 쪽의 빈자리는 내 걸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엄마가 가슴에 속옷을 대고 있었던 이유.근래 엄마가 모든 것에 날이 선 이유.그 모든 건 엄마의 유방암때문이다.오 년 전,엄마는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예상치 못한 추락 때문이었을까.엄마의 얼굴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여자로서 유방암은 청천벽력과도 같다.예견되지 않은 추락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하지만 엄마가 추락한 곳은 끝이 없는 곳이었다.의사의 소견으로는 엄마의 가슴에 이미 많은 양의 암세포가 퍼졌다고 했다.결국 엄마는 외눈박이도 아닌 하나의 가슴으로 살아야 했다.그런 엄마가 가슴에 속옷을 댄 모습을 보니 가슴이 무너졌다.그날 밤,나는 꿈을 꿨다.엄마의 가슴 때문에 아파하는 내 마음속 가슴,그 가슴 한 부분을 잘라 엄마에게 주는 꿈을.

거실은 텔레비전 소리로 가득찼다.또 다시 연속극의 주인공이 소리를 질렀다.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가 보였다.조금씩 걸음을 재촉하며 소파 쪽으로 갔다.엄마….낮은 목소리로 부르며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나는 어제 저녁의 엄마를 봤다며 얘기했다.품냄새를 맡으며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라고 얘기했다.엄마 역시 내 마음을 안 걸까.이내 나를 토닥여 주었다.

“모든 엄마들은 강하다고 하지만 어떤 때에는 흔들리는 법도 있더라.인생을 살아오며 느낀 건데 삶이란 원래 흔들리고 아프다가도 행복해지는 게 맞는 거 같아.누구나 흔들리지 않는 삶이란 없잖아.하지만 내 딸이 이렇게 응원을 해주니 더 힘 내볼게.”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순간,불안하던 엄마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엄마의 흔들림이 멈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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