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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안 된 사법권력,그 씁쓸한 시작

김정인 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요즘 사법농단을 대하는 사법부의 태도를 보면 늘 떠올리게 되는 씁쓸한 역사가 있다.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36년간의 식민지배가 막 끝나는 감격의 순간이었지만,그 때 바로 인생 최대의 좌절을 맞본 사람들이 있었다.조선변호사시험을 치르던 한국인들이었다.항복 선언으로 수험생들은 시험을 중단한 채 귀가했다.이 사실을 접하면서 일본이 패망하는 순간까지 입신출세에 매달리며 법조인이 되려고 한 한국인들이 존재했다는 걸 알고 씁쓸했다.

더욱 놀라운 건,이후 그들이 보인 태도였다.수험생들은 시험 중단이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므로 모두에게 합격증을 교부하라며 집단행동에 들어갔다.결국 연락이 두절된 사람을 제외한 106명이 합격증을 손에 넣었다.이 숫자는 1935년에서 1944년까지 10년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숫자에 맞먹었다.일본의 패망을 전후해 여운형은 마치 예상한 듯 ‘건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조선건국동맹을 건설했고 누군가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광’을 소리 높여 외치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그리고 조선변호사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처럼 일본이 패망하든 말든 자신의 영달에만 목을 맨 이들이 있었다.사법농단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자기 보전에 급급한 행태를 보며,사법권력은 태생적으로 개인적 영달만을 좇던 법조인의 전철을 밟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해방을 맞아 사법권력이 무엇보다 청산해야 했던 것은 소위 조서재판이었다.본래 사법제도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겨났다.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법제도가 성립한 이래 법치주의에 입각한 인권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졌다.1898년 러시아어 통역관 출신 각료로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유배를 가게 된 김홍륙이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넣는 사건이 발생했다.대한제국 정부는 죄인을 심문하면서 고문했다.독립협회는 임금을 독살하려 한 범죄자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은 인민 생명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김홍륙과 사건 관련자들이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되자,독립협회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정권퇴진운동을 벌였고 결국 승리했다.

이러한 선각적 인권의식은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로 넘어가면서 철저히 무시되었다.태형이라는 전근대적인 형벌이 도입되었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 작성한 조서라도 재판에서 아무렇지 않게 증거로 채택되었다.고문-허위 자백-조서 작성의 과정을 거치며 조작되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그래서 조서재판이란 말이 생겨났다.해방 이후 조서재판이라는 반인권적 풍토의 청산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사법권력은 독재 권력이 조작한 간첩 사건을 조서대로 판결했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기까지 했다.

사법권력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했다.그럼에도 자신들이 지금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다는 사실을 여전히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청산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관성 때문이다.정치권력이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70여 년 동안 사법권력은 1945년 8월 15일로부터 한 치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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