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희송 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 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산업의 발달과정에서 도시는 인간에 의해 세워졌다.그러나 도시가 완성되자 인간은 곧 시민이란 이름의 부속품들이 되었다.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시민의 공간’이란 개념에서 도시의 인간 지배를 거부했다.인간의 존재가치를 철학적으로 구현한 공간으로써 도시가 존재할 때 현대적 인본주의는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렇게 개념화된 광장이나 공원 같은 도시의 공간들은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감성적 에테르(Ether)를 요구했다.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도시공간의 개념은 이것이다.현대의 휴머니즘이 도시를 이렇게 정의하는 요즈음 선진적 자세로 ‘도시공간’을 개념화하고 있는 곳이 있다.바로 강릉이다.

문화행사와 그 철학적 의미 부여가 동시에 격을 이루어 시민에게 주인임을 요구하는 도시는 그리 많지 않다.불과 20여만 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강릉은 물리적,추상적 공간확보와 그 공간의 감성적 또는 이성적 이용의 자유를 시민에게 배려하고 있다.아침마다 태양을 잉태해 내는 바다를 상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릉을 떠올린다.저녁마다 노을을 펼치는 치마폭으로는 누가 보아도 오대산과 계방산의 준령들이 제격이다.대관령 굽이들은 하늘과 맞닿은 바다 그리고 그를 연모하는 도시,강릉을 발치에 펼쳐놓는다.이러한 자연을 공간화한 강릉의 10월은 올해도 어김없이 인문학과 예술로 치장되고 있다.

주변을 얼핏 보자.커피축제,소금강 청학제 걷기 대회,허난설헌 축제,교산 허균 400주기 추모 전국 대회 등 굵직한 행사들만 하더라도 다 적기 힘들 정도이다.강릉아트센터의 세심한 기획력은 칭찬받을 만하다.로컬아티스트 릴레이 프로젝트에서부터 ‘보이는 것,보는 것’,‘강릉학생 문화예술축제’,‘강릉여류구상작가회’ 등이 끊임없이 아트센터에 줄을 서고 있다.강릉미술관에서의 행사들도 훈훈하다.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실험들이 섬유와 도자기라는 도구들에 새겨졌고,그림다우리 교류전 등이 시민들을 불러 세웠다.강릉미술관에서 시립 교향악단을 초청해 여는 ‘미술관 음악회’는 참신함의 새로운 개념이다.강릉을 강릉으로 만드는 강릉만의 시공간은 제4회 솔향가곡제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다른 도시들의 시향은 시민과의 접촉점을 시민을 청중화함으로써만 찾는다.강릉에서는 성악가가 아닌 시민들을 시향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운다.유석원 지휘자는 희귀하게도 악기 간의 횡단 면적 화음보다 악기들의 시계열적 화음을 추구하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음악가다.그가 지휘하는 강릉시향의 연주가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벌써 4년째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 속에서도 몇 가지 개선할 측면이 보인다.첫째,시민과의 소통이 충분하지 않다.질 높은 전시들이 일반 시민으로부터 유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큰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벤트적 요소가 지배적이다.그러므로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근접성은 작은 행사들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둘째,강릉의 내부적 에너지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 미흡하다.시민들이 행사에 주된 관심을 두면 주관적,철학적 욕구가 상대적으로 위축된다.일상을 풍부하게 만드는 힘은 ‘행사’가 아닌 평소에 맞닥트리는 환경적 요소들의 격(格)에서 최종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다.현대적 ‘도시공간’은 인문학적 시민을 길러내야 할 책임을 문화행사 기획자들에게 요구한다.따라서 물리적 행사는 늘 그를 이해하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정서를 시민들에게 채워가는 평소의 노력을 전제로 하여 서비스적 가치를 가진다.

10월의 강릉은 낭만이다.그리고 강릉은 강릉만의 문화로 그 공간들을 채울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이를 꾸준히 발전시켜 물리적 측면으로부터 정신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게 채워진 진정한 공간을 강릉시민들이 온통 차지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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