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란 안전거리서 유지되는 ‘우리’란 이름
리메이크 영화 ‘ 완벽한 타인’
핸드폰 공유한 십년지기 친구들
각자 비밀 드러나며 파국 맞아
한사람이 가진 여러 개의 얼굴
서로 ‘ 타인’이라는 것 인정해야
‘ 평화로운 관계’ 담보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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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저녁식탁에 둘러앉은 행복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한 이 사진은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이다.영화 ‘완벽한 타인’은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스’(Perfect Strangers·2016)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원작을 성공적으로 리메이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펑샤오강 감독의 ‘핸드폰’(手機·2003)이 떠올랐다.‘완벽한 타인’을 이끌어가고 있는 실제 주인공은 핸드폰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영화 ‘핸드폰’은 주인공인 유명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옌쇼우이가 내밀한 비밀이 담긴 핸드폰의 관리 부실로 이혼을 당하고 프로그램 진행자의 자리도 내주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스마트폰이 나오기 훨씬 전의 이야기지만 한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주는 핸드폰이 가진 편리함과 은밀함,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도 스마트폰은 십년지기 친구와 배우자를 한 순간에 완전한 타인으로 만들어버린다.집들이 호스트인 예진은 집들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아무튼 이 핸드폰이 문제야,쓸 데 없이 너무 많은 게 들어 있어.아마 여기도 핸드폰 보자고 하면 못 보여줄 사람 많을걸.…우리 게임 한 번 해볼까?다들 핸드폰 올려봐.저녁 먹는 동안 오는 모든 걸 공유하는 거야,전화,문자,카톡,이메일 할 것 없이 싹.” 죽마고우인 친구들은 서로 아무것도 감출 게 없다고,얼마든지 공개해도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그 허세는 몇 통의 전화와 문자,카톡으로 곧 어색해지고 만다.

핸드폰,이메일,카톡의 수많은 잠금장치들은 연약한 비밀번호 하나에 의지해 열리고 닫힌다.그 연약한 문턱을 넘어서면 한 개인의 수많은 얼굴이 드러난다.그 위험한 문이 열리고 비밀이 드러나면서 결국 친밀했던 모든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애피타이저에서 식사로,다시 디저트까지 먹는 식사시간은 시한폭탄이 되어,그들 사이는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향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이 제목이 의미하는 ‘완벽한 타인’은,가장 친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타인이었다는 씁쓸함을 던져주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런데,이 영화는 또 다른 엔딩도 얹어놓았다.만약 게임을 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똑같은 일상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또 하나의 결말.석호는 정신과의사인 아내 몰래 정신과 상담을 받을 것이고,태호는 어김없이 날마다 한 여성의 사진을 전송받을 것이며,수현은 고상한 드레스 안에 섹시한 속옷을 입고,영배는 동성 연인과 관계를 이어갈 것이다.(바람둥이 준모에게는 포장해 줄 말이 없다)

그들은 각자의 비밀 안에서 비로소 고통을 해소하려는 노력,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작은 일탈을 꿈꾸며,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을 찾게 된다.비밀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를 가진다.어떤 비밀은 은밀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매우 사소한 것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어떤 비밀은 드러나야 하지만 어떤 비밀은 드러나지 않은 채 있는 것이 한 개인과 관계를 지켜주기도 한다.내밀하고,부끄럽고,사소한 비밀들을 낱낱하게 드러내야만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완벽한 타인’의 엔딩으로는 짧은 자막이 나타난다.“사람들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공적인 나,개인적인 나,비밀의 나.” 이 말은 원작 영화의 “공적인 삶,사적인 삶,비밀의 삶(a public life,a private life,a secret life)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사(公私)’의 구분은 칼로 베듯 명확한 것인지,또 ‘공적인 나’는 ‘개인적인 나’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그것이 공적인 영역이든 사적인 영역이든 ‘비밀의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모든 사람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한 개인으로 살아간다.바꾸어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타인이 되어 살아간다.친구,가족,연인,동료 같은 이름은 ‘타인’이라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거리감을 좁힐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 사람 자체가 될 수 없다.비밀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전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원작 영화의 영어제목은 ‘완벽한 타인들’(Perfect Strangers),리메이크된 영화의 영어제목은 ‘친밀한 타인들’(Intimate Strangers·2018)이다.‘완벽함’과 ‘친밀함’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이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완벽하게 타인이 되었을 때,비로소 진정한 친밀함을 가질 수 있다.‘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우리가 결국 타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면,‘너’의 비밀이 아니라 ‘너’에 대한 사랑,이해,공감,위로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그거면 충분할 것 같다.


>>> 유강하 강원대 교수
중국고전문학,신화를 전공했다.지금은 강원대학교에서 인문예술치료를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아름다움,그 불멸의 이야기’,‘고전 다시 쓰기와 문화 리텔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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