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되던 구한말.여성의 항일운동은 계몽과 교육 분야에 국한됐다.이같은 시대상황을 극복하고 무장 항일운동에 앞장선 여전사가 있었다.18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6살에 춘천 유림인 고흥유씨 맏아들(제원)과 결혼한후 20년 만에 첫아들을 출산했으나 그다음 해 발생한 을미사변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시아버지(유홍석)와 남편을 따라 의병 최전선에 참가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여성 의병부대를 조직하고,글과 가요를 만들어 배포하는 심리전 등을 전개했다.

1910년 나라를 잃자 일제하에서 살기 싫다며 그다음 해 유씨 집안은 중국 요녕성 산간오지로 망명한다.그녀는 그곳에서 교육기관을 세워 반일사상을 고취하고,항일무장단체인 조선독립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펼쳤다.시아버지와 남편의 사망에도 항일운동을 이어 갔으나,1935년 큰아들인 돈상마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사망하자,12일 뒤에 76세로 숨졌다.40년 동안 항일투사였던 철의 여인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가녀린 어머니였다.그녀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의사다.만주에 있던 그녀의 유해는 1994년 친손자인 유연익이 발굴해 춘천 남면 선영에 안장했다.

그런데 그녀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가장 낮은 애족장(5등급)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독립유공자 서훈은 △대한민국장(1등급)△대통령장(2등급)△독립장(3등급)△애국장(4등급)△애족장(5등급) 등으로 나뉜다.1949년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는 357명으로 강원 도내는 5명이라고 한다.그녀는 40년 동안 독립투쟁 최일선에 있었지만,만주의 독립운동 활동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윤희순 의사 기념사업회는 그녀의 서훈등급을 올리기 위한 재심 신청서를 준비하고 있다.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다.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의 서훈은 3등급이라고 한다.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여성 독립유공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윤희순 의사가 만주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불렀다는 신세타령이 가슴에 와 닿는다.“이역만리 이내 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우리 의병 어디 가고 왜놈 군대 득실하나/이내 몸은 어이할꼬, 어디 간들 반겨줄까”.그녀의 탄식이 후손을 향해 외치는 것 같다.

권재혁 논설위원 kwonjh@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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