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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김장

유현옥 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 유현옥 한국여성수련원장
▲ 유현옥 한국여성수련원장
눈이 펑펑 내리는 주말,김장을 했다.엄밀히 말하면 엄마의 김장에 참여한 것.사실 내게는 김장이 그리 친숙한 것이 아니다.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을 놓아본 적이 없는 나는 김장은 고사하고 김치를 친정엄마와 동생에게 얻어먹고 살았다.요즘 이런저런 김장소식에 동생에게 김치를 얻어먹을 심산으로 김장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엄마를 위한 김장을 하자고 제안했다.“우리가 언제 엄마와 같이 김장을 하겠어?엄마 건강할 때 다모여서 김장하자.”

팔순이 넘은 엄마가 지휘하는 ‘이벤트’는 딸 셋을 호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춘천,강릉,서울 사는 딸들이 모여 시끌시끌하니 김장이 시작됐다.배추의 상태,그리고 갖은 양념의 비율을 조절하고 최종 판단하는 것,모두가 엄마의 몫이었다.살림꾼인 둘째는 가끔씩 엄마와 말씨름을 하며 배추에 넣을 속의 간을 조절하고 이 이벤트를 제안한 셋째는 자신의 거실을 작업공간으로 제공한 탓에 갖은 도구와 준비물을 챙기느라 쉴 틈이 없다.거기에 그 딸까지 동참해 종종 걸음을 한다.애초에 이 김장 이벤트 참가자 중 별 역할이 없는 나는 파,마늘을 다듬고 갈거나 썰어내는 작업의 보조자다.존재감이 별로 없다.김치라곤 신혼 초 한번 쯤 해봤을까.

한 번 김치를 직접 담그려고 시도 했으나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가 퇴근이 늦어지는 바람에 완전 절임이 돼 김치를 담글 수 없는 상태가 된 이후로는 김치 만들어 먹는 일을 포기했다.바지런한 엄마는 무척 고무되어 콧노래를 부르며 전 과정을 진두지휘한다.귀가 어두워져 우리와 대화할 때 가끔은 고성이 오가지만 눈치로 대부분 알아듣는다.아무렴,우리가 함께 산 시간이 있는데.엄마의 손때가 묻은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등장하고 총각김치에는 설탕이 들어가면 물이 생겨 안 된다,젓갈을 너무 넣으면 맛이 탁해진다…강원도 토박이인 엄마의 김치 레시피가 줄줄이 읊어지고 일할 생각이 별로 없는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쏟아지는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다.그러면서 약간 우울해진다.‘엄마의 저 방식을 누가 기억해 낼까?아직 온전히 김치 만들기를 해본 적 없는데 엄마맛 김치를 앞으로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관찰자 수준의 일꾼은 생각만 키운다.엄마 김치에서 시작해 생활문화 유산에 대한 보존과 활용으로 확장된다.김치와 장 담그는 일,절기마다 해먹던 음식,그리고 여러 가지 가례들 가운데는 우리 세대를 넘지 못하고 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것이 너무 많다.빠른 생활패턴의 변화가 가져다준 결과이지만 그 의미와 보전가치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내가 일하는 한국여성수련원 인근 솔숲에는 공동묘지가 있다.주변이 묘지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이것도 곧 사라질 우리의 생활문화유산이야.저 둥그러니 나지막한 무덤이 얼마나 정겹니?”나이가 들어가서 그럴까?오랜 세월이 눌러서 나직하니 곡선을 이루는 묘지들이 예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인다.

산책길에서 종종 만나곤 하는 묘지는 대부분 묘비도 없이 누구도 돌보지 않는 듯 조금만 지나면 평지를 이룰 듯하다.그 가운데 ‘학생김해김공지…(學生金海金公之…)’,‘묘(墓)’ 자를 땅에 박고 있는 비가 있다.걷다가 거기쯤 도달하면 나는 평생에 이렇다 할 관직을 갖지 못했을 김해 김씨 어느 분의 삶을 상상해보려고 애쓴다.그리곤 우리 원을 찾는 분들이 여기를 산책하며 삶과 죽음을 환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프로그램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보곤 한다.엄마의 김장이 내년에도 이루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분의 기억에 남은 생활문화를 정리하고 다듬는 일이 내게 남겨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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