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임금은 술에 관대했다.역사적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때는 1796년(정조20년) 4월11일 2경(밤10시).성균관 유생 이정용이 술에 취해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을 자다 붙잡혔다.당시 ‘일성록’에도 ‘유생이 술에 취해 야금을 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임금이 사는 궁궐 담벼락을 베게 삼아 큰 대(大)자로 누워 잠을 잤으니 중죄라면 중죄다.그러나 정조는 죄를 묻는 대신 “조정 관료와 선비들은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에 취하는 풍류를 모른다.이 유생은 술 마시는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술 값으로 쌀 1포를 지급하라”고 명한다.

술에 약한 정약용에겐 필통에 술을 부어 마시게 했을 정도로 짓궂었던 정조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시경(詩經)에 나오는 ‘염염야음 불취무귀·厭厭夜飮 不醉無歸(흐뭇한 술자리 밤에 벌어졌으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며 술을 권했다.‘不醉無歸’는 현재까지 건배사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구절.군자의 ‘음주’는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공자는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모습에 대해 “백날을 수고하고 하루를 즐기는 것”이라며 개의치 않았다.논어 향당편(鄕黨篇)에는 ‘오직 주량은 한정이 없으시되 정신이 혼란스러운 데는 이르지 않으셨다(唯酒無量 不及亂·유주무량불급난)’고 공자의 음주법을 전한다.

술자리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때다.여전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분위기가 있긴 하나 주법은 예전과 같지 않다.7 to 9!밤 9시면 문을 닫는 장소에서 모임을 갖는 ‘신데렐라송년회’가 인기를 끌고,아예 술을 마시지 않거나 ‘석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지침을 따른다.‘꽃은 반쯤 핀 것이 좋고 술도 반만 취한 것이 좋다’는 얘기다.적절히 마시고 중간에 그칠 줄을 아는 적중이지(適中而止)의 주법!

술꾼들은 술 취하는 단계로 네 단계를 꼽는다.긴장된 입이 풀리는 해구(解口),미운 것도 예뻐 보이는 해색(解色),분통과 원한이 풀리는 해원(解怨),인사불성이 되는 해망(解妄)이 그 것.건배사로 인기를 끈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면 불가능도 성공이 된다)’이면 좋으련만 解妄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올 송년회는 ‘한가지 술만으로 일차에서 9시까지만(119)’하거나 ‘8시에 만나 9시에 끝내고 2차는 없는(892)’ 자리이길.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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