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사실에 가까운 인체표현, 예술혁명을 이루다
그리스 아테네국립고고학박물관 청동상
처음엔 삼지창 든 ‘포세이돈’으로 명명
최근 번개를 든 ‘제우스’로 더 많이 불려

▲ 아테네국립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제우스(또는 포세이돈) 청동상.순간의 동작을 표현한 제우스 청동상의 상반신을 통해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파르테논의 조각품들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지 못했다.그래서 당시 작품 수준을 보기 위해 온전한 다른 작품을 찾게 된다.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남자’가 있다.그러나 그것도 로마시대에 대리석으로 베껴놓은 조각품이다.그 원작은 청동상이었을 것이다.그와 같은 청동조각상을 원작으로 볼 수는 없을까.파르테논의 미술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말이다.

아테네국립고고학박물관에서 그런 청동상을 만날 수 있다.햇살좋은 날의 아크로폴리스,그 북쪽으로 오모니아(Omonia) 역을 찾을 수 있다.인구 350만 도시 아테네의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거기서 내리면 된다.그곳에 기원전 5세기의 작품들이 있는 전시실,그 한 가운데에 파르테논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이 청동 조각 작품이 서 있다.왼손을 앞으로 뻗어 무언가를 겨냥하고 있는 모습이다.오른손에는 무엇인가가 들려있었을 것이다.던지는 동작을 더 힘찬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앞으로 나온 왼발 엄지 쪽이 살짝 들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올 때다.그 미묘한 동작이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이 작품 전체를 더 역동적으로 보이게 한다.오른손을 막 던지려는 순간의 동작이 보여주는 장엄함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박물관은 ‘포세이돈’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별도의 패널을 만들어 이 작품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1928년 9월에 어부들이 이 조각상을 바다에서 발견했다.같은 해변에서 2년 전에 그 왼쪽 팔이 먼저 발견되었다.오른손에 들려있던 물건은 소실되어 발견되지 않았다.옥에 티처럼 보이는 뻥 뚫린 눈에는 청동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눈동자가 있었을 테지만 그 역시 지금은 없다.처음에 많은 학자들은 바다에서 나온 이 작품을 오른손에 삼지창을 들고 파도를 다스리고 있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일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는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작품 바로 옆에 붙인 공식적인 제목도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으로 되어 있다.잰슨(Janson)이 쓴 고전적인 책 ‘미술의 역사’도 1997년 개정판에서 포세이돈을 제우스로 고쳐 소개하고 있다.똑같은 포즈를 하고 오른 손에 번개를 들고 있는 작게 만든 제우스 작품이 있어서다.이 신상(神像) 옆에 그 작품도 비교할 수 있게 전시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이런 작품들로 해서 완성된 인체표현을 보여주게 된다.더 이상 어색하거나 유치한 표현은 찾을 수 없다.기원전 6세기 초만 해도 로봇이나 기계처럼 깎여있는 청년상을 만들던 그리스가 보여주는 놀라운 변화다.그리스 신화를 집대성한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 시대의 미술은 더욱 형편없는 상태였다.그보다 몇 천 년이나 앞서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작품들에 비할 수 없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그러던 그리스에서 오리엔트 미술을 모방해 겨우 어색하고 뻣뻣한 ‘고졸(archaic)’한 조각이 시작되고 불과 한 세기만에 이룬 엄청난 예술혁명이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미술은,근육 표현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다 마침내 5세기에 들어 작품 ‘창을 든 남자’와 같이 다리 한쪽에 힘을 싣고 다른 쪽 무릎을 살짝 굽힌 인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목과 허리가 반대로 꼬이는 신라 이후의 마애불상이나 석굴암 사천왕상 같은 숱한 3곡 자세(tribhanga)의 기원이 되는 바로 그 형태다.동방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면서 마침내 도달한 조각의 경지가 이런 기원전 5세기의 작품들이다.그리고 그런 미술의 완성도를 한껏 뽐낸 조각품들이 그 세기 중엽에 파르테논을 가득 채우게 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가 거두어들인 엄청난 보화를 쏟아 부은 전승기념물이 파르테논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그것은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 민주주의의 이중성과도 비슷하다.노예와 여성과 외국인을 뺀 소수의 성인 남성의 민주주의였던 것,아테네가 다른 도시국가에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이었다는 한계 같은 것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테논과 여기 두 작품의 위치는 분명하다.미술이 때마다 참조하는 고전중의 고전이라는 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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