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인, 스물넷이 될, 스물넷을 지나온 모두에 희망을


누구든 대중의 범위에 포함되고
문화의 향유자가 될 수 있지만
대중문화 얼굴 평등한 표정일까
새내기 인턴 고 김용균씨에게
스마트폰 음악 속 사랑·꿈 이야기
어쩌면 먼 세상 일 불과했을 수도
문화향유에 차별 있으면 안돼
좋아하는 것 즐기는 새해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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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는 사뭇 비장하다.한 해의 마지막 칼럼으로 어떤 주제를 써야 할지,지난달부터 고민을 해왔다.‘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며 사랑을 이야기해야 할지,연말 콘서트에 대해 말해야 할지 고민이 길었다.아무튼,‘아듀,2018’ 하며 멋지게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내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글을 읽고 쓰다 보면,어떤 글은 저자와 무관하게 그 글의 운명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아마도 이번 글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나는 올해 5월부터 ‘대중문화칼럼’을 쓰기 시작했다.보고 읽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내 글을 모든 사람들이 읽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글을 썼다.때로 음악이,때로는 영화와 책이,때로는 사회의 현상이,한 마디로 ‘대중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이 칼럼의 주제가 되었다.

‘대중문화’.여기에서 대중이라는 단어는 경계가 불분명하다.대중이라는 명사는 성별,나이,직업을 아우르는 모호한 개념이다.그래서 글의 방향을 잡기가 어렵기도 했는데,같은 이유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대중’에 해당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문화라고 할 만한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일 터이므로.그러니 누구든 대중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고,누구나 문화의 향유자가 될 수 있다.문화의 향유 방식에서 비용의 문제가 발생하기는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애호의 감정이나 취향이 바뀌지는 않는다.음악,책,영화,그림에 대한 취향과 애호는 경제적 조건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음악을 듣고,재미있는 글을 찾아 읽고,사진과 동영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에는 남녀노소의 차이가 없을 것 같다.어두컴컴한 작업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외롭게 일했던 한 청년도 그랬을 것이다.

지난 주,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지만,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젊은 청년의 죽음은 아프게 다가왔다.청년은 이제 겨우 만으로 스물넷이 되었다.어마어마한 규모의 컨테이너 벨트에 몸이 빨려 들어가 사망한 그의 이름은 김용균이다.(그 죽음의 참혹한 모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사람의 이름 앞에 ‘고’(故) 자가 붙는 걸 바라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인터넷 창을 열 때마다 고인(故人)이 된 청년의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고 김용균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회사의 시책으로 사흘 만에 현장으로 투입되었다고 한다.그는 이제 입사 두 달을 넘긴 새내기 인턴이라 그가 입던 작업복에는 때가 낄 시간조차 없었다.그의 유품이 고작 컵라면,과자,사비로 산 손전등,스마트폰 충전기라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충전된 스마트폰으로 업무지시를 받았겠지만,때로는 음악을 듣고,게임을 하며,웹툰을 보거나,페북 친구들에게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을 것이다.그 역시 꿈꾸기 좋은 스물넷이었으므로.

컵라면과 과자를 유품으로 남긴 청년에게 스마트폰의 불빛은 헤드랜턴을 대신했다.그에게 스마트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은 저 먼 세상의 사랑과 연애,꿈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대중문화가 문자 그대로 대중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문화를 의미하는 것일까?고인이 된 청년을 생각하면,대중문화의 얼굴은 평등한 표정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이건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정치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중문화는 우리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줄 그어놓은 정치,문화,경제,사회와 다른 범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오히려 그 사이를 오가고 경계를 허물며 만들어지고 소멸하는 것이다.고 김용균이 즐기고 행복해했던 것이 무엇이든,그것은 문화의 범주 안에 있을 것이다.생명에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듯,문화를 향유하는 데에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호오와 취향이 있을 뿐이다.

환호가 섞인 것이든 슬픔이 섞인 것이든,나는 시간에 떠밀려 ‘아듀’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성급한 반성과 후회가 밀려들곤 한다.한해의 마지막에 한 청년의 죽음을 보며 절망했지만,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그래서 늘 그래왔듯,한해의 끝자락에서 나는 또 바라고 꿈꾼다.‘지금,여기’에 스물넷인,앞으로 스물넷이 될,그리고 스물넷을 지나온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음악이든,책이든,뮤지컬이든 그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스마트폰 너머의 세상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시간이 되기를.새해니까,무엇이든 바랄 수 있는 시간이니까.한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이 떠올라 ‘아듀,2018’이라는 인사는 안녕하지 못하다.


유강하 강원대 교수

중국고전문학,신화를 전공했다.지금은 강원대학교에서 인문예술치료를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아름다움,그 불멸의 이야기’,‘고전 다시 쓰기와 문화 리텔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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