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에서 결혼과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다.이런저런 사연을 담은 휴먼다큐멘터리였던 것 같은데 그 중 이런 것이 있었다.한 출연자는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특별한 깜짝이벤트를 준비했다.아버지는 딸의 결혼식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그 때부터 평생 접해보지 못한 낯선 악기 앞에서 씨름을 시작했다.투박하고 거친 손과 피아노 건반이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런 시도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다.얼굴에 굵은 주름이 파이고 흰머리가 드문드문한 나이에 피아노 연주에 도전하다니 말이다.그것도 취미 삼아 그저 한 번 해보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한 번인 딸의 결혼식에서 많은 하객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야말로 ‘생방송’을 해야 하는 일이다.딸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삐끗하면 망신을 당하는 위험부담을 안아야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 마음을 꺾지 않았고 딸의 결혼식에서 멋진 연주복을 차려입고 딸을 위한 깜짝 이벤트를 무리 없이 해냈다.조금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그 속엔 딸을 향한 아버지의 진한 사랑이 있었고 그게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그러나 이 엄청난 일이 그저 사랑만으로 이뤄진 건 아니었다.아버지의 깜짝 이벤트를 가능하게 한 것은 카메라에는 잡히지는 않았지만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기까지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기적은 아버지의 사랑과 노력의 합작품이었다.아버지는 마디가 굵어지고 감각이 둔해진 손가락으로 그 낯선 건반이 한 몸처럼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그 생략된 과정마저 실제 화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었다.아버지는 이 낯설고 두려운 건반을 얼마나 누르고 또 눌렀을까.데면데면하기 짝이 없는 손가락과 건반이 스스로 제짝을 찾아가 듯 자연스러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복을 했을까.

엊그제 조간신문을 읽는데 문득 그 장면이 떠올랐다.2018년 스위스 게자 안다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준우승한 피아니스트 박종해(29)가 금호아트홀의 2019년 상주음악가가 됐다는 기사였다.그는 “어려운 곡도 관객 눈엔 쉽게 치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한다”라고 말했다.그때 아버지도 자신의 연주가 하객들에게 편안했으면 하고 그렇게 애썼을 것이다.나는 남에게 쉬워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생각해본다.

김상수 논설실장 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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