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슬픔 노래한 초허 문학혼 김동명문학관서 만난다
강릉 사천면 문학관·생가 건립
‘파초’잎 형상 시비에 얼굴 부조
시집·육필원고·사진 등 보존

김동명(金東鳴·1900∼1968년) 처럼 파란만장하게 역사의 격랑을 헤친 문인이 또 있을까.‘파초와 호수의 시인’으로 통하는 그는 한국의 대표적 전원파 문인이면서 일제강점기에 망국의 통한을 노래한 ‘민족시인’이다.또 교육자로,기독교인으로,정치논객으로,정치인으로 여러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지자적 인물로 통한다.조선어 말살이라는 서슬퍼런 암흑기에 우리 언어인 한글로 시작(詩作)에 열중하고,창씨개명을 거부하면서 끝내 붓을 꺾은 지사적 풍모는 민족시인으로서 존재감을 더욱 빛낸다.

▲ 김동명 생가와 문학관 전경.
▲ 김동명 생가와 문학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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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 있는 ‘김동명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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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명 시인의 얼굴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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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명 첫 시집 ‘나의 거문고’.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는 ‘김동명 문학관’이 세워져 있어 시대의 목격자요,역사의 증언자로서 김동명 시인의 활화산 같은 문학혼과 담대한 생애를 만날 수 있다.김동명의 유년기 동심이 노닐었을 생가터를 중심으로 8656㎡ 부지에 2013년 조성된 문학관에 들어서면 시비와 함께 생가,김동명 언덕 등의 시설이 방문객을 반긴다.시비는 1985년 당시 명주군에서 사천면 국도 7호선변에 세웠던 것을 2018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시비는 대표시(詩) ‘파초’ 잎을 형상화한 것으로,관동대 교수를 지낸 오세원 조각가 작품이다.시비에는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은 김동명 시인의 노년기 얼굴이 선굵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짙은 눈썹에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은 고난의 시대에 자연과 인간의 존엄을 노래하면서 민초들의 아픔과 함께한 거인이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하다.

단층 건물인 문학관은 그의 대표시 ‘내마음’에 등장하는 호수와 돛단배를 형상화했고,그 옆 생가는 고증을 거쳐 아담한 초가로 복원됐다.초가집은 평생 자연과 어머니를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며 고향 강릉을 그리워하고,청빈을 갈구하는 삶을 일관한 시인의 생애를 웅변하는 듯 하다.

문학관 뒤 야트막한 야산에는 강릉의 자랑인 소나무와 대나무가 사철 상록의 기상을 뽐낸다.문학관 내에는 1930년에 발간된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필두로 다수의 시집과 육필 원고,생전의 활동 사진 등이 전시돼 시인을 만나는 즐거움을 더한다.

‘김동명 문학 연구’로 1986년 성균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평생 김동명 문학혼 조명과 선양에 앞장서온 엄창섭 김동명학회 회장(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은 “김동명 시인은 나라를 뺏긴 민족의 통한을 우리 말 문학과 기독교의 박애정신으로 극복한 예지적 인물이자 투사적 존재였다”며 “제도권의 구속을 거부한 자유로운 영혼으로 시와 소설,수필은 물론 정치평론의 새지평을 품격있게 열어 보인 김동명 시인의 문학과 삶의 거적(巨跡)은 실로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최동열 dychoi@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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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 교수 시절 김동명 시인.
김동명 시인은


호는 초허(超虛).8살 때 함경남도로 이주했고,일본에 유학해 신학을 전공했다.1923년 ‘개벽’지를 통해 등단,1930년 첫시집 ‘나의 거문고’,1936년 ‘파초’를 간행했다.창씨개명을 거부하며 1942년 ‘술 노래’를 끝으로 광복 때까지 붓을 꺾었다.1947년 월남해 이화여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고,1955년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문학상을 수상했다.1955년 ‘적과 동지’ 발간 후 정치평론가로 새 지평을 열었고,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됐다.2010년에 서울 망우동 묘지를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 노동하리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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