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극복한 특별한 우정, 차별없는 세상 연주하다
60년대 인종차별 다룬 ‘그린북’
흑인 연주자 돈셜리 실화 바탕
인종 넘어선 뜨거운 브로맨스
아카데미 상 백미 수상자 소감
환경오염·소수자 차별정책 등
세상 향한 메시지 강렬한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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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즌이 돌아왔다.제91회 아카데미시상식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 국내에도 차례로 개봉되어 선보이고 있다.여러 작품이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Green Book, 2018)이 눈길을 끈다.토론토영화제 관객상,전미비평가위원회 작품상,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인종차별’이라는 해묵은 그러나 여전히 낡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영화의 제목인 ‘그린 북’은 이름처럼 산뜻한 책이 아니다.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여행할 때 숙지해야 했던 일종의 가이드북이다.‘유색인종 전용’(coloured only) 호텔,식당 등을 안내하는 책자를 가리킨다.제목에 이미 영화의 주제가 농후하게 드러나 있다.

‘그린 북’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이다.백악관에서 14개월 동안 두 번의 공연을 했던 천재 뮤지션이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과 같은 화장실을 쓰지 못하는 돈 셜리와 가진 건 주먹뿐이고 무식한(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랑하는’(dear)의 철자도 제대로 모르는) 이탈리아계 운전수 토니 발레롱가의 우정이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백인과 흑인의 우정을 다룬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그린 북’과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언터처블’(Untouchable, 2011)도 있는데,두 영화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흑인과 백인의 구도가 정반대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그린 북’은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흑인 고용주-백인 피고용자’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대,흑인이 남부로 8주 동안의 콘서트 투어를 떠나는 것은 토니의 말대로 ‘미친 짓’이다.흑인의 식사는 전통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니 연주만 하고 나가라는 레스토랑,일몰 후 흑인의 통행을 금지하는 도시,초대된 연주자에게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는 집사,고급 슈트를 차려입은 흑인에게 주먹부터 날리는 상황이 남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진다.용기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남부로의 투어를 계획한 셜리에게 콘서트 투어는 아티스트로서의 자부심을 펼치는 일이 아니라 차별,편견,모멸,굴욕감을 견뎌야 하는 고행의 여정이다.돈 셜리 역을 맡은 마허샬라 알리의 자존감을 가장한 슬픈 눈빛은 평론가들의 극찬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깊고 진하다.

사실 우리에게 인종차별은 크게 와 닿는 주제가 아니다.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인‘종’(人‘種’)차별이라는 문제를 다만 생물학적 영역만이 아니라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해볼 수 있다면,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특징을 근거로 차별하고·차별받는 것을 인종차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차별의 영역은 무한대로 확장된다.비슷한 외모를 가졌지만 개개인의 발음과 억양,식성은 출신지역을 쉬이 짐작하게 한다.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차별적 용어들이 인터넷에서 유령처럼 떠돌고,성별과 나이에 근거한 혐오발언은 빠른 속도로 신조어들을 쏟아내고 있다.그래서 인종차별을 다룬 이 영화를 ‘지금 여기’라는 맥락에서 펼쳐보면,새롭고 다르게 읽힌다.

유명세를 타는 영화들이 그렇듯,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논란이 있었다.셜리와 토니의 관계에 대한 유족들 사이의 설전과 폭로,늘 그렇듯 그들의 진짜 관계는 시간이 더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영화 ‘그린 북’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inspired by true story) 작품일 뿐이다.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인종차별이 만성화되고 노골적이었던 시기에 인종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그저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는 소박한 과정을 담고 있어서일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 하나 기다려지는 장면이 있다.오스카상 수상자의 수상 연설이다.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레버넌트’(The Revenant, 2015)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설은 오랫동안 회자됐다.“기후변화는 현실이고,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지구상의’ 모든 종(種)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입니다.…(중략)…지구라는 이 행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맙시다.” 지난 해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Missouri·2017)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이렇게 말했다.“혹시 제가 쓰러지면 일으켜 주세요.오늘 제가 할 얘기가 있거든요.…(중략)…오늘 밤,우리가 남겨두어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포용 조항(inclusion rider).”수상자들의 의무는 아니지만,그들은 때로 환경에 대해,인종차별을 비롯한 소수자 차별정책에 향해 자신의 소신을 밝혀왔다.짧지만 강렬한 메시지,아카데미 시상식이 기다려지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다.

‘그린 북’이 마음을 건드린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주제 때문만은 아니다.묵직한 주제를 그린 영화들,그리고 영화 시상식보다 여운을 주는 것은 뒤에 남겨진 이야기들이다.에피소드,수상소감은 때로 감동적인 영화음악처럼 오랫동안 귓가에 머문다.


유강하 강원대 교수

중국고전문학,신화를 전공했다.지금은 강원대학교에서 인문예술치료를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아름다움,그 불멸의 이야기’,‘고전 다시 쓰기와 문화 리텔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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