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발가벗겨도 70리를 뛴다.” 이 말은 필자가 90년대 초 양양주재 기자로 있을 때 들었습니다.처음엔 당시 양양이 속초와의 도농통합에 반대하던 때라 양양사람들의 지독함을 빗 덴 말로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 뜻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그런데 15년 뒤 횡성주재 기자로 근무하면서 같은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이 말은 횡성과 양양사람들이 3·1운동 때 일제에 얼마나 저항했는지 일본군인과 순경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내일(1일)은 3·1운동 100주년 되는 날입니다.당시 강원 도민 2만5465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해 35명이 숨진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밝혔습니다.도내 전역에서 처절한 항거가 이어진 가운데 양양과 횡성이 가장 격렬했다고 합니다.그중에서 양양의 조화벽(1895∼1975)지사와 횡성의 김순이(1878∼1952)열사는 3·1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입니다.

양양 유지의 외동딸로 태어난 조화벽은 유관순 열사의 오빠 유우석의 부인입니다.3·1운동 당시 개성 오수돈 여학생이었는데 휴교령으로 고향에 와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천안 영명여학교 교사 부임 후 유관순 열사의 집안 사정을 듣고 유우석을 옥바라지했고,부부의 연을 맺어 두 시동생까지 데리고 다니며 교사생활을 했습니다.그 후 양양에서 정명학원을 설립해 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김순이는 주막집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주변사람들은 홀대했습니다.기골이 장대해 황소아줌마로 불렸습니다.만세운동 모의장소와 독립자금 지원,4월1일 횡성장날 만세운동 때 일본 경찰에 쫓겨 온 동지들을 규합해 진두지휘하다 투옥됐습니다.그러나 독립운동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자 횡성주민들이 1990년 그녀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묘비를 세웠습니다.

3·1운동 참여자중 여성들이 많았습니다.그러나 독립유공자 1만5000명중 여성은 357명(도내 5명)으로 2.4%에 불과합니다.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도 어제(26일) 국가유공자 서훈1등급으로 추서됐습니다.김순이 열사처럼 독립유공자에 추서되지 못한 강원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더 있을 것입니다.여성독립운동가 발굴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권재혁 논설위원 kwonjh@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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