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춘천유생 중심 의병활동 시작, 광복군 정신적 원류
지역민과 협력 항일구국운동
원주 등 영서 의병활동 성과
강릉의병 위정척사사상 바탕
개항장 원산 공략 북상 항전
도내 의병 독립운동가 149명
원주 23명 최다 영월·춘천 순

▲ 일제에 끌려가는 의병들의 모습.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일제에 끌려가는 의병들의 모습.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근 국방부는 ‘대한민국 국군’이란 제목의 홍보책자를 발간,“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일제 강점기 독립군으로,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발전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라고 기술했다.그러면서 국군의 역사의 시작점을 ‘의병전쟁기’(1894-1910)로 표현했다.강원도에서도 항일운동의 시작점으로 1890년대 활발히 전개된 의병활동에 눈길이 간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기록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강원도내 의병활동 독립운동가 유공자(본적지 기준)는 북강원도와 울진군(현 경북)을 포함해 137명에 달한다.여기에 강원도내에서 활동했으나 본적지가 미상이거나 기타로 분류된 인원까지 더하면 149명으로 늘어난다.지역별로는 영월 25명,원주 23명,춘천 16명 순으로 집계돼 영서지역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이 펼쳐진 것으로 기록됐다.

 

 

한말의병은 박은식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이란 민군이다.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로서 일어나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분연히 대적하는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당시 우리나라의 의병은 일본이라는 외세에 대항해 국권을 수호하고자 반침략 구국항쟁을 전개한 민족운동의 중심인 독립운동가였다.

춘천지역의 전기 의병운동은 1895년 8월20일 민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 사변이 조선인의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시작됐다.화서학통을 이은 유중교·유인석·유중악·유홍석·유봉석·이소응·이진응 등 위정척사론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의병봉기의 분위기는 어느 곳보다도 거셌다.1896년 1월에 춘천유생을 중심으로 군인·상인·포군 등 400여명이 춘천관찰부를 습격·점령하면서 춘천의병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1896년 1월 20일에 당시 명망이 높은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했다.이후 서울로 향해 진격했으나 가평 벌업산에서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이소응은 이진응과 이만응·이경응에게 의진을 위임한 후 제천 유인석 의진에 합류했다.이후 이진응은 전사했고 이경응은 강릉의병 민용호 의진에 합류해 항일의병활동을 계속했다.또 1895년 의병장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그 며느리인 항일운동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의병군가’,‘병정가’ 등을 작사·작곡해 부르게 해서 의병운동을 고취하고 부녀자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고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죄상을 꾸짖었다.

 

 

▲ 조선 말기 강릉의병장 민용호가 자신의 의병항전 사실을 일기식으로 기술한 책.필사본.독립기념관 소장.
▲ 조선 말기 강릉의병장 민용호가 자신의 의병항전 사실을 일기식으로 기술한 책.필사본.독립기념관 소장.

 

원주에서는 신식군대에 군인들이 의병으로 활동,타 지역보다 우수한 병력을 보유하며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민긍호는 당시 원주 진위대 고성 분견대의 정교였다.1907년 8월 5일,원주 수비대가 해산될 위기를 맞게 되자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군대를 거두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하며 약 3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우편취급소 등 계속해서 일경을 습격했다.이후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했다.이들 소의병부대는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활약했다.

춘천과 원주 등 영서지역 의병활동은 지역민들과 의병이 협력해 항일구국운동을 전개,다수의 성과를 올렸다.민긍호 의병장 등 군인출신의 의병들의 맹활약도 있었지만 지역에 산포수가 많아 전투역량을 높일 수 있었다.또 산악지대가 많아 유격전에 유리했고 무기제조장을 설치,화약과 병기의 자체공급이 가능했다.

이양숙 강원서부보훈지청 보훈과장은 “강원도의 의병활동은 1910년 경술국치를 대일항쟁기간 만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당시 춘천지역 유림들이 지니고 있었던 척사이념이 남달리 철저했는데 춘천의병은 특히 민족주의 성장의 기본원칙을 제시해 광복군의 정신적 원류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외교권 등 국권이 박탈당하자 우리 민족은 두가지 방향으로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계몽 활동,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됐다.또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됐다.당시 경기 여주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한 민용호가 관동지방 진출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강릉으로 가 저명한 유학자로서 강릉 유림의 지도자였던 권인규를 찾아왔다.민용호는 권인규에게 의병운동의 방향을 상세히 지도받은 후 영동 일대의 의진과 연합하고 산군 지방의 포수들을 모집,영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이병채·최중봉 등 의병장을 규합했다.또 권인규는 이병채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운동의 방향제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이후 아들 권종해,손자 권기수 3대가 모두 의병운동에 투신,항일의병운동사상 두드러지는 집안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1895년 12월 민용호의 강릉의병은 개항장 원산 공략을 목표로 북정을 떠나 주문진·양양·간성을 지나 함경도 지역으로 북상했다.강릉의 의병은 ‘위정척사’ 정신을 사상적 기반으로 성립,강릉 유생들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에 나섰다.의병정신을 통한 애국애족의 씨앗은 더욱 드높아져 강릉 활빈당 활동,만세운동,강릉농업학교독서회(항일학생운동) 등 민중운동의 원동력이 됐다.최근중 광복회 강원영동북부연합지회장은 “북강원 원산으로 진격하기 위해 강릉 의진들이 모여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하지만 날씨와 무기의 열악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양양,강릉,삼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이어갔다”며 “의병활동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민족의식의 불씨를 살려 3·1운동,임시정부수립 등 독립의 역사가 이어져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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