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항거' 틈입하는 빛과 노래 이야기
서대문형무소 여성 수인 내용
기녀·학생·임신부 등 독립운동 참여
웃음기 거둔 저예산 흑백영화
막힌 벽 틈새로 빛과 소리 전달
비명·주먹밥 삼키는 모습 반복
젊은 조선인 삶 그대로 보여줘

▲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중 한 장면.
▲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중 한 장면.

올해는 3·1절 100주년을 맞는 해다.이 역사적인 기념일 때문인지,일제치하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평소보다 눈에 더 들어온다.영화 ‘말모이’,‘자전차왕 엄복동’,‘항거’가 그들이다.‘말모이’가 일제 치하에서 조선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면,‘자전차왕 엄복동’은 조선인 자전차 선수 엄복동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스타급 배우와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된 이들 영화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관객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이면 절로 애국심이 고취되는 문법,그래서 이들 영화의 곳곳에는 웃음포인트가 숨어 있다.

반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함으로 무장한 영화도 있다.웃음기와 함께 색채까지 빼버린,고급진 블록버스터 규모와는 거리가 먼 저예산 흑백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그것이다.이 영화는 부제에 쓰인 것처럼,일제의 치세에 항거했던 한 열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유관순,수인번호 371번,여옥사 8호실,서대문형무소에서 끝내 나오지 못했던 한 소녀의 이야기.(이 글에서 ‘수인’(囚人)은 죄수가 아니라, ‘갇힌 자’의 의미로 사용했다.)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독립투사,유관순 누나에서 유관순 열사가 된 소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을 받은 리더.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에 대한 내 지식은 거의 교과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유관순 연구’라는 학술저널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작고 사소한 지식들은 언제나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나는 이 흑백영화를 ‘빛과 소리’로 읽었다.존재는 있으되 형체가 없는 것,그러므로 자유자재로 모든 곳을 드나들 수 있는 것,그곳이 설령 서대문형무소일지라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것,빛과 소리.그래서일까,영화 속의 모든 소리는 끝내 서대문형무소 밖을 나오지 못한 그녀에 바치는 진혼곡으로,빛은 그녀를 위한 제의로 들리고 보인다.

영화 ‘항거’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이유로 서대문형무소 8호실에 갇힌 여성 수인들의 이야기이다.기녀,학생,아이를 가진 임신부,아들을 잃은 어머니,크고 작은 사연을 가진 여성들은 8호실에 갇혀 있다.그녀들을 가둔 서대문형무소의 단단한 벽을 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녀들을 완전히 가두지는 못한다.무형(無形)의 빛과 소리가 형무소 벽의 틈새로 부단히 틈입하기 때문이다.빛은 어김없이 때에 맞추어 무심히 쏟아지고,갇힌 옥사 안에서 그녀들이 부르는 노래는 벽과 건물의 틈새를 파고든다.빛은 좁은 8호실 안으로,옥사에서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 위로,망가진 몸으로 누워있는 유관순의 몸 위로 평등하게 내려앉는다.8호실 여인들이 부른 조선어 노래,개사된 가사는 방과 방 사이로 전해지며 공포스러운 적막감을 깨뜨린다.

“뭐야? 조용히 하랬지!” 여성 간수의 겁박에도 노래는 계속된다.옥중에서 처음에 불린 노래는 ‘아리랑’이다.옥사에서 그녀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가사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가 아니라,“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이다.

풍년을 노래하는 이 가사는,옥사로 배급된 한 덩이 주먹밥과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비참한 현실을 일깨운다.

형무소 벽의 틈새를 넘나드는 소리가 노래만은 아니다.조선어(일상어)와 일본어(명령어)가,주먹밥을 씹어 삼키는 소리가,비명과 신음소리가 그 사이를 채운다.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유관순과 8호실의 조선여인들이 주먹밥을 씹어 삼키는 장면이다.수인이 된 그녀들이 주먹밥을 씹어 삼키는 장면과 소리가 여러 차례,길게 반복된다.이 장면은 제 아무리 강인한 독립투사라고 할지라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피와 살을 가진 존재,그러니까 ‘나와 똑같은’ 한 인간일 뿐임을 보여준다.모진 고문 끝내 자궁이 파열되어 피를 쏟아내면서 주먹밥을 삼키는 소녀 유관순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저예산 흑백영화로 완성된 이 영화는 ‘동주’(2015)와 닮아 있다.잠시라도 가슴을 통쾌하게 해줄 시원한 액션 하나 없지만,젊은 조선인이 살아냈던 날것 그대로의 삶은 관객을 매료한다.

한 사람이 살아냈던 날것 그대로의 삶은 영화의 테크닉을,각본의 매력을 간단히 뛰어넘는다.

영화는 유관순이 끝내 살아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그녀를 고문했던 정춘영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담담히 알려주며 마무리된다.‘소리’는 영화의 끝까지 이어진다.엔딩크레딧의 왼쪽으로는 유관순의 수형자카드를 시작으로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 동지였던 여성들의 수형자카드가 차례로 올라가고 엔딩곡으로 소박한 노래가 깔린다.유관순을 연기했던 배우 고아성이 부른 ‘작별’이다.“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동지여. … 어디 간들 잊으리오?” 기교를 부리지 않는 목소리에 담긴 가사는 꼭 백년을 격(隔)해 있는 또 다른 동지를 향한 노래처럼 들린다.지금,여기의 우리를 향한 노래.


유강하 강원대 교수

중국고전문학·신화를 전공했다.지금은 강원대학교에서 인문예술치료를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아름다움,그 불멸의 이야기’,‘고전 다시 쓰기와 문화 리텔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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