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와 씨름하느라 슬금슬금 오는 봄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어제오늘 성큼 다가선 봄을 알겠다.우수 경칩을 다 지나 열흘 뒤면 봄의 네 번째 절기 춘분(春分)이다.며칠 전 단열이 신통치 않은 14층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키 낮은 재스민이 꽃을 피운 걸 발견하고는 놀랐다.잎을 다 떨어뜨리고 맨몸으로 겨우내 한데서 지낸 꽃나무다.전면 유리창에 성에가 끼고 꽁꽁 얼어붙을 때도 버려진 것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저러다 새순을 못 피우지 못하고 고사(枯死)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던 꽃나무다.

모처럼 흙먼지가 사라진 지난 주말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하려는 마음으로 베란다에 나섰다가 연하게 희거나 보랏빛을 띤 꽃잎을 보았다.매일매일 들에 나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대면할 일이 없는 이들에게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런 변화를 알기 어렵다.요즘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그만큼 멀어져 있고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에 둔감하다.이미 정해진 모두의 공통 절기(節期)와 각자의 몸으로 느끼는 개별적 계절은 시차(時差)가 있게 마련이다.부지불식간에 곁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놀란 경험이 있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울타리 너머 꽤 큰 텃밭이 내려다 한눈에 보인다.길이 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고립돼 가는 중이지만 이만큼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다.며칠 전 이웃주민의 그 텃밭에서 캔 냉이가 밥상에 올랐다.궂은 날이 이어지는 동안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니었다.식탁위에 오른 냉이를 대하고서야 무심히 지낸 자신을 회복한 것이다.미세먼지 때문에 불편을 겪고 고통을 호소하는 날이 많았다.그 책임 소재를 두고 싸웠고,누구 탓이 큰 가를 두고 또 씨름했다.몸이 그러했고,마음이 그러했다.

텃밭의 겉모습은 지난해 묵은 그대로다.아침저녁 아파트 베란다에도 냉기가 남아있다.그 묵은 밭이 소리 없이 냉이를 키워 무심한 식탁에 봄소식을 알린 것이다.베란다의 재스민 또한 오랜 인내 끝에 꽃을 피워 무심한 주인에게 이름을 알렸다.그 여린 꽃잎을 피워냄으로써 재스민이 되었고,봄의 전령이 되었다.냉이는 퇴화돼 가는 입맛을 돌아오게 했다.재스민 꽃잎은 너무 얇고 담박해서 마음을 정화(淨化)시켜주는 것 같았다.재스민의 꽃말을 사랑이라고도 한다.기지개를 켜고 몸으로,마음으로 봄을 느껴보자.

김상수 논설실장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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