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은 그의 소지품에서 나온 엽전 800냥을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고 식당 주인에게 지필을 가져오게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하는 포고문을 한 장 써서 그 끝에 ‘海州 白雲坊 基洞 金昌洙’라고 서명해 큰 길가에 붙이게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태연히 자신을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석 달이 지나 순검과 사령 수십 명이 몰려와 황해도 자택에 있던 백범은 체포되고 문초 끝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였다는 사실을 안 고종의 특사 령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898년에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하여 잠시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농촌 계몽 활동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백범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보면 나오는 이야기들이다.차제에 현대인들은 필자 역시 이미 두 번 숙독한 바 있는 백범일지를 탐독하여 그의 뜨거운 민족혼(魂)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백범은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 마다하지 않고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항일무장 투쟁 단체 애국단 창설을 조직하여 안중근,이봉창,윤봉길 등 의사들을 배출하여 친일파와 일본 주요 인사들에 대한 암살과 테러활동을 전개하여 일본제국을 전전긍긍하게 하였다.이때의 일제는 백범 체포에 혈안이 되어 현상금 60만원(현 200억원)을 내 걸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나중에 주석을 역임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백범의 정치관은 구국 일념 속에 통일정부였으며 철저한 친미주의자 이승만과 달리 그는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라는 신념 속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임정내 공산주의자와 갈등도 컸지만 포용정치를 하려고 애쓰면서 자신의 입신양명이 아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큰 정치를 펼쳤다.
오늘날 보편타당한 애국애족의 대의(大義)정치는 실종된 채 당리당략 정치,파벌정치,사리사욕 정치가 판을 치는 것을 목도하면서 독립된 내 나라,번영하는 내 나라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불사했던 선열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자손만대에 물려 줄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한 대의명분에 우선하는 정치체제로의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임시정부100주년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