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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6·25한국전쟁과 근현대사] <5> 중국군의 춘계공세와 유엔군의 반격

전투기 26분간 융단폭격, 최후방 방어선 지켜내다
중국군 주력 중부전선 투입
양평~횡성 일대 공세 강화
원주저지선 가까스로 사수
유엔군 낙동강 워커라인 설정
인민군과 대대적 전투 전개
다부동전투 사상자만 3만명

박창현 chpark@kado.net 2019년 03월 16일 토요일
▲ 원주 근교 교항리 마을에 한 차례 미 전투기 공습이 끝나자 주민들이 가재도구라도 건지려고 불타는 집터에 접근하고 있다(1951.2.23) 사진 출처=NARA
▲ 원주 근교 교항리 마을에 한 차례 미 전투기 공습이 끝나자 주민들이 가재도구라도 건지려고 불타는 집터에 접근하고 있다(1951.2.23) 사진 출처=NARA


#춘계공세를 방어한 원주 저지선

1951년 2월로 접어들면서 중국군은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로 집결시키고 원산에서 재편성한 중국군 제9병단을 춘천으로 이동시키며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이는 중부전선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섬멸하려는 중국군 평더화이의 복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즉,서부전선에서는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진격을 막고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횡성(삼마치고개) 일대의 유엔군 진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 것이다.

중국군 제13병단은 1951년 2월 11일 밤 8시 30분 9개 사단 병력을 국군 제8사단과 제3사단이 방어 중인 횡성 북방의 삼마치고개에 투입하였다.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국군은 사력을 다해 방어했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4시간 후인 2월 12일 오전 1시 무렵에는 고립되고 말았다.이에 유엔군 리지웨이 장군은 지평리~원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고 2월 12일 오후에 원주 일대의 새로운 방어지역을 점령토록 했다.

그러나 중국군도 12일 지평리 남쪽의 곡수리를 차단함으로써 유엔군 증원에 대비한 강력한 저지선을 구축하였다.2월 13일 어둠이 찾아오자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전투는 15일까지 계속되었다.중국군은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공세를 취했다.이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아군 진지를 사수하여 중국군의 춘계공세를 방어할 수 있었다.(정명복 지음 ‘6·25전쟁사’ 참고)

▲ 중국군이 횡성전투에서 나팔을 불며 공격하고 있다(1951. 2.) 출처/중국해방군화보사(눈빛출판사)
▲ 중국군이 횡성전투에서 나팔을 불며 공격하고 있다(1951. 2.) 출처/중국해방군화보사(눈빛출판사)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

1950년 7월 말, 인민군은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부산과 대구를 비롯한 낙동강 동쪽 일부만 대한민국 영토로 남아 있었다.그러자 유엔군은 8월 1일 군 수뇌부 합동작전회의에서 부산과 대구를 교두보로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만들었다(워커,미8군 사령관).이 ‘워커라인’은 마산 서남쪽 진동을 기점으로 시작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창녕군 남지읍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왜관,거기서 안동,영덕을 잇는 선으로 남북 약 135㎞,동서 약 90킬로미터의 네모꼴이었다.1950년 8월 초순 이후 유엔군과 인민군 양측은 이 ‘워커라인’을 사이에 두고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인민군은 2개 군단의 5개 사단 병력으로 이를 돌파하는 남하작전을 폈고 유엔군은 미 제8군 4개 사단,그리고 국군 6개 사단 병력으로 이를 방어하는데 총력작전을 펼쳤다.

전투의 시작은 인민군과 유엔군이 달랐다.인민군은 야포의 포격으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유엔군은 L-19 정찰기의 ‘윙’ 하는 비행소리가 전투개시의 전주곡이었다.유엔군 측은 야포의 포격에 앞서 먼저 정찰기를 띄워 적정부터 살폈기 때문이다.양측은 보병의 공격에 앞서 포병들이 적진지에 포탄을 마구 퍼부었다. 그런 뒤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워 적진지로 돌진했고 유엔군 측은 공군 폭격기로 적진을 초토화시킨 다음,뒤따라 보병들이 공격했다.대체로 인민군은 야간 전투에 강했고 공군력과 화력이 앞선 국군과 유엔군은 주간전투에 강했다.

유엔군은 8월 16일 대공세 전환 작전으로 융단폭격을 감행했다.이 작전은 마치 물뿌리개로 꽃밭에 물을 주는 것처럼 하늘에서 폭탄을 쏟았다.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프랑스 해안에 쏟아 부은 대폭격 작전을 원용했다.

일본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1950년 8월 16일 낮 11시 58분 낙동강전선에 이르렀다.이들 전폭기들은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채 500파운드(약 225㎏)와 1000파운드(약 450㎏)의 폭탄을 마치 염소들이 똥을 누는 것처럼 주르르 땅 위에 마구 쏟았다.이 무차별 융단폭격은 오후 12시 24분까지 정확히 26분간 계속됐다.이처럼 낙동강 다부동전투는 50여 일 동안 피아 약 3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 중 가장 큰 전투였다.한국전쟁 당시 지상은 유엔군과 인민군이 일전일퇴를 했지만 하늘과 바다에서는 유엔군 전투기와 항공모함이 장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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