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40분 쯤 러시아 하얼빈 역에서 일곱 발의 총소리가 났다.그중 세 발의 총탄을 맞은 68세 노인이 쓰러져 후송됐으나 숨졌다.총 쏜 사람은 30살의 한국 청년이었다.그 청년은 총 쏜 후 도망가지 않고 ‘대한 만세’를 외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청년의 이름은 안중근(1879∼1910)이고,죽은 노인은 일본의 초대 총리를 비롯해 총리 네 번과 초대 조선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1841∼1909)였다.이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결국 109년 전 오늘(26일) 오전10시 뤼순감옥 사형대에 올랐다.교도소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후 유언을 묻자 “동양평화를 위해 전력을 다해 달라”는 말과 함께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장사 지내 달라”는 반장(返葬)을 부탁한 후 어머니가 지어 보낸 하얀 명주 한복을 입은 채 생을 마감했다.안 의사는 일본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유해를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았다.안 의사의 묘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우려했다.또 어디에 묻었는지 구체적인 매장위치를 남기지 않았다.그냥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사형집행 보고서에 적었다.안중근 의거는 3.1운동과 일제시대 항일 투쟁의 정신적 지주가 됐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1946년 김구선생이 효창공원에 마련한 안 의사의 가묘만 있을 뿐이다.2005∼2008년 남북이 공동 유해발굴을 했지만 실패했다.

올해는 안중근 의거 110주년과 탄생 140주년이고,내년은 그의 순국 110주년이 된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안 의사의 유해 발굴 작업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안 의사는 황해도 해주출신으로 북한에서도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존경받고,남북 평화시대를 맞아 남북 공동 유해발굴에 대한 최고의 공감대 형성으로 발굴 가능성이 높다.이제 남은 것은 중국과 일본의 협조를 받는 일이다.안 의사 유해발굴에 남북과 중국·일본 등 4개국이 모두 참여한다면 안 의사가 꿈꾸던 동양평화가 진척될 수 있다.안 의사의 유해 발굴에 대해 중국과 일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권재혁 논설위원 kwonjh@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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