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옛날 중국 한(漢)나라 때 애중(哀仲)이라는 사람의 집에 크고 맛이 좋은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러나 배나무 주인 애씨는 안타깝게도 그 맛난 배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깊은 고민에 빠졌것다. 그러다 어느 날 기막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저 맛있는 배를 쪄먹는다면 맛이 얼마나 더 좋을꼬.' 궁리 끝에 나온 이 기발한 생각 그대로 애씨는 드디어 배를 쪄서 먹었는데-.
 이 사건 이후 '좋고 나쁨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 또는 그러한 작태'를 일컬어 애리증식(哀梨蒸食)이라 했다는 얘기 아닌가. 진(晉)나라 때 대사마 대장군으로 있던 환온(桓溫)이란 사람은 화가 날 때마다 "애씨네 배도 쪄먹을 놈"이란 욕설을 퍼부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또 억울한 혐의를 일러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하고, 그 유명한 '삼국연의'의 위왕 조조(曹操)가 잠을 자다 배나무 귀신에 목이 졸려 죽었다 하니, 시인 소식(蘇軾)이 제 아무리 "전일에는 천 그루 배나무 눈에 덮인 듯하더니(舊日郭西千樹雪)" 하고 읊었지만 모름지기 중국 고사에 배나무는 이렇게 별로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다.
 우리에게 와서 배나무 얘기는 좀 달라진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선비 유희경(劉希慶)을 그리워하다가 젊은 나이로 죽은 기생 매창(梅窓)이 읊은 시다. 비에 지는 배꽃을 '이화우'라 하다니! 우리 문학 속에서 배는 "배꽃 피는 뒷동산에 두견이 울고" 하거나 시인 임제(林悌)처럼 "달빛 어린 배꽃 보며 눈물 흘린다" 하여 사랑 봄날 연민 등의 애틋한 이미지로 살아 있다.
 초·중·고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갈 때마다 우리는 도중에 낙산사엘 반드시 들렀다. 사실 우리는 송강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 속에 의상대 일출이 어떻게 노래됐는지, '화엄경'이 어떻고, 파랑새가 어디로 날아가고, 조신지몽(調信之夢)이 그야말로 얼마나 헛된 꿈이었는지를 굳이 설명하려 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홍예문을 지나 원통대전으로 가는 그 언덕길 옆 수천 그루 배나무 가지에 달린 잘 생긴 배를 바라보며 침을 흘릴 따름이었다.
 바로 그 배가 유명한 낙산배다. 조선 중기에 낙산사 주변에 재배하여 특산물로 진상했던 황실배인 낙산배. 그 배를 우리는 저마다 생긴 얼굴대로 떠들어대며 한 입 써억 베어 무는 것을 시작으로 아귀가 미어지게 허발대신하며 먹어댔다. 낙산배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물론 그 때 우리가 맛본 낙산배는 황실배가 아니라 1900년대 초 나주배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재배하기 시작한 장십랑이었지만, 오봉산 황토와 동해 바다 바람이 빚어낸 낙산배의 신묘한 그 맛을 어찌 나주배에 비할 바이던가.
 올 봄 우리는 다시 낙산을 찾았었다. 그리운 옛 풍광은 사라졌으나 그 때 그 자리에 낙산배 시조목이 잘 보존돼 있고, 남대천 건너 양양농업기술센터에 후손이라 할 신품종 원황배나무 수백 그루가 즐비해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 중 몇 그루를 1 년 간 분양 받아 놨었다. 초봄에 배꽃솎기도 했고, 망종 이전에 어린 배를 따 주기도 했으며, 단오 뒤엔 게을리 않고 봉지 씌우기도 마쳤다.
 우리 마을들은 저 옛날에 나름대로 특화 전략을 폈던 것을. 일본식 일촌(一村) 일품(一品) 운동이나 마찌즈꾸리(마을 만들기) 사업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말이다. 이제 가을이 되면 우리가 분양 받은 아름다운 마을 양양의 그 배나무에 낙산배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애리증식이라 하였으니 부디 누군들 가을에 따먹을 우리들의 낙산배에 가벼이 값을 매기려 들지 말라. 낙산배를 베어 물며 우리들은 눈물나는 유년 시절을 그리워할 것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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