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동해안 산불이 일어난 지 일주일째다.불은 꺼졌으나 후유증은 오래 갈 것이다.어떤 것은 곧 회복되겠지만,또 어떤 것은 몇 달,혹은 몇 년이 걸릴 것이다.100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들도 있다.조림지 회복엔 30년,잿더미가 된 토양 완전 복원엔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화마(火魔)는 휙 지나갔지만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숙제로 던져놓았다.4월은 잔인하다지만 올핸 그 본성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심하다.잔인한 것보다 무서운 게 무심한 것이다.이번 불이 일깨워주는 것들도 있다.

화마는 봄의 길목을 가로막고 모든 것을 앗아갔다.그러나 하루하루 무료하기까지 했던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려주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모든 사라진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가족과 이웃을 위해 그 무서운 불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고,이웃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던 경찰과 소방대원,군인들이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용(無用)의 순간에도 유용(有用)하게 나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이번 산불은 많은 것들을 빼앗아갔지만 많은 것들을 되돌려 준 것이다.

또 간과했던 것을 다시 보게 한다.전국에서 800여 대의 소방차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할 수만 있었다면 제주에서도 왔을 것이다.지난해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비상도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B/C(비용·편익분석)라는 알듯 모를 듯한 셈법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하며 얼마나 한심하고 위험한 계산을 하고 있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설악산 자락이 불에 검게 그을리고 마을과 도심이 화공(火攻)을 받고나서야 어떻게 가꿔야 할 자연이고,어떻게 지켜야할 삶의 터전인지가 보다 분명해 졌다.이번 불을 통해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얻었다.서울양양고속도로가 없었다면 더 많은 피해를 내고도,거기까지가 최선이었음을 무지하게 자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마냥 다 잃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이것은 우리가 그 어떤 절망과 고난 속에서도 반드시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다시 가야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김상수 논설실장 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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