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수 강릉수요포럼 회장

▲ 정인수 강릉수요포럼 회장
▲ 정인수 강릉수요포럼 회장
올해로 4·19 민중혁명이 일어난 지 59년이 되었다.4·19 혁명은 3·15부정선거 규탄에서 비롯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피플파워를 보여 준 역사적 대 사건이다.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국민에게 토지를 주고 양반과 상놈과 남녀차별을 없애는 등 나름의 업적으로 국민에게 인기가 높았다.그러나 자유당을 근간으로 장기집권을 도모해 국민들로부터 식상해 인기가 없어졌다.현실이 이러함에도 1960년 치러진 선거에서 이승만 4선의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자유당 정권은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는 것은 대통령 유고시에 대통령직을 승계하기 위한 술수였던 것이다.자유당 정권은 내무부 관료들과 정치깡패 이정재,임하수 등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4할 사전투표 등 폭력과 관권이 총동원되어 치러진 부정선거 결과,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95~99%를 이승만 963만 표(85%),이기붕 833만 표(73%)로 재 조작 발표했다.쇼 치고는 기상천외한 저급한 코미디였다.

3월15일 마산(현 창원시)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마침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는 만행을 자행했다.이때 마산앞바다에서 시위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로 수면에 떠오르자 더욱 분노한 군중은 쓰나미처럼 불어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자유당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쳤다.

자유당 정권은 성난 민중의 힘에 눌리자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와 선전선동에 놀아난 것이라 둘러대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군중에게 무자비한 총질을 감행했다.이때 사망자 186명,부상자 1500여명이 발생했다.결국 독재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버리고 1960년 4월26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로 도망가야 했다.이러한 결과는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를 촉발하고 마침내 대통령이 하야한 것이다.

이승만의 재임 중 대표적 과오가 6·25 전쟁이 터진 후 6월27일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등과 함께 줄행랑을 치면서 한강인도교를 기습 폭파해버린 것이다.이로 인해 피난길에 나섰던 애꿎은 수백 명의 시민들이 폭파당하거나 한강에 수장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소신으로 알려진 북진통일 논(論)과 달리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사사오입 개헌,대통령 중임제 철폐,거창양민학살 사건,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보안법 제정을 통한 철권정치 강화를 비롯한 수많은 과오는 제한된 지면상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유감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 한다’고 했다던가.3·15 부정선거와 같은 역사적 과오는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늘은 사는 우리들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그것이 바로 위대한 4·19 민중혁명의 역사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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