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이런 생각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가둬 두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진다.나중에 다시 떠올리려고 해봐도 그 분명했던 생각이 쉽게 되살아나지 않는다.기억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좋은 생각이나 스쳐가는 영감을 붙잡아 두기가 어렵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그 엄청난 저술을 가능하게 한 뒷심이 뭘까.두 가지를 꼽자면 하나는 고립이 주는 여백이 아닐까.그가 나랏일에 정력을 빼앗기고 당쟁에 휘말려 기력을 소진했다면 언감생심이다.그렇다고 외적 환경이 저절로 저작으로 이어졌을 리 없다.한양대 정민 교수는 “다산의 위대한 학문 뒤에는 체질화된 메모습관이 있다”고 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와 같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메모의 힘이다.그는 연행(燕行)을 떠나면서 벼루와 붓,먹과 공책을 먼저 챙겼다.낯선 여정에서 만날 예측 불가의 상황,그 보다 더 큰 기복(起伏)을 겪게 될 심리적 변화를 담아 낼 준비가 돼 있었다.그가 이처럼 촘촘한 메모의 그물망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최고의 여행기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이 있다.천재의 기억력보다 둔재의 메모가 낫다는 것이다.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요즘에도 메모의 위력을 실감한다.최영미 시인의 25년 전 일기가 고은 시인의 성 추행 의혹사건 중요 증거로 인정됐고,쇼트트랙 심석희 선수의 메모가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력 혐의를 인정하는데 결정적 단서로 작용했다.당시의 정황과 심리를 기록한 흔적이 없었다면 법원의 판결도 달랐을 것이다.

얼마 전 공개된 미국의 로버트 뮬러 특검 보고서에 트럼프 대통령이 참모들의 메모에 부담을 느낀 일화가 눈길을 끈다.워싱턴포스트(WP)는 백악관 참모 10여 명이 메모 기록을 제출했고,특검수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도했다.이 때문에 옛 참모들이 트럼트의 보복을 걱정한다고도 한다.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메모다.그 위력을 어떻게 대하느냐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김상수 논설실장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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