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동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는 샌델이 ‘정의’를 주제로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했던 일련의 강의를 단행본으로 엮어 펴낸 번역서다.책에서 다루어졌던 소주제들 가운데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던 대목이 있다.

‘능력주의에 정의는 없는가?’ 이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나름 자부심에 가득 차 있을 법한 하버드생들에게 개인적 성취에 따른 차등적 배분에 대한 기대가 과연 정의로운 발상인가를 묻는 도발적 문제제기였다. 이 질문을 샌델은 자유주의자들과 대비되는 롤스의 입장에 서서 풀어나갔다.여기서 샌델의 초점은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공정한 능력주의사회’에서 업적을 근거로 주어지는 차등적 배분이 합법적이긴 하나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맞추어져 있었다.따라서 사회적으로 후덕한 보상이 약속된 자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좋은 가정환경에서 이를 발현시켜 성공한 이들은 생물학적 잠재력이나 사회구조적 요인들로 인해 뒤처진 사람들을 당연히 이해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미투 운동 이후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장자연, 김학의 사건에 이어 정준영, 승리의 뉴스를 연일 대하면서 문득 겹친 생각이 방금 얘기한 샌델의 강의였다.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 공정한 기회구조를 전제로 얻은 과실을 놓고도 그것의 향유가 어떤 측면에서 정당화되고 또 어떤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는지를 묻고 성찰한다.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권력, 인기, 돈을 매개로 한 여성의 상품화와 성폭행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그렇다고 미국사회를 총체적으로 미화하고 우리사회의 현실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이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된 나라가 미국이고, ‘양성평등’이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논의들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을 모든 영역에서 남성의 동등한 파트너이자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우리사회에서는 아직 문화로 정착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치기는 어렵다.

물론 단시일에 해결될 일은 아니다.대의 민주주의로의 긴 여정 속에서 대의의 토대인 ‘인민’이나 ‘시민’의 개념에도 오랜 기간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이성과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유주의자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러한 ‘남성주의적 전제’에 충격을 가한 대표적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남자로 출생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개인적 노력도 없이 인간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해 맹목적 우월감을 갖고 성장하는 왜곡된 현실을 개탄했다.또 여성에게서 사회활동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인류의 절반이 창조해 낼 수 있는 ‘막대한 이익’을 매장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역설했다.데이비드 헬드는 밀의 시각을 성적 불평등에 따른 여성의 배제가 여성에 내재해 있는 엄청난 재능을 사회적으로 박탈해 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헬드는 ‘민주주의의 모델들’에서 결국 “여성의 해방 없이는 인간성의 해방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밀의 주장임을 강조한다.

샌델이 제기한 질문까지는 나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여성을 평등한 실체로 인정하고 협업하며 인류의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새삼 되묻게 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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