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창성 서울본부장

이낙연은 한 나라의 국무총리다.그는 자신이 보좌하는 대통령의 취임 2주년을 전후해 괴이한 발언을 해 주목을 받았다.한 방송사가 대통령과 대담 프로를 마련했다.대담을 맡았던 방송사 기자가 일견 대담하게 도발적인 질문을 대통령에게 던졌다.국민 일부와 야권에서 거론되는 ‘독재자 대통령’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의였다.그 뒤 대통령 지지자와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여당에서 비난성 발언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가관은 기자의 친인척에 대한 비방도 득세했다는 점이다.가히 볼 만 하고 크게 한번 웃을 만 한 블랙 코미디요,한편의 소극(笑劇)이었다.

이낙연도 이 소극에 가세해 주목을 받았다.그는 짐짓 언론사 대선배라는 점을 과시하듯 방송사 대담 기자를 포함해 수많은 기자들을 겨냥해 한 마디를 던졌다.자신의 페이스북에 “신문의 ‘문’자는 들을 ‘문(聞)’자인데 많은 기자들은 물을 ‘문(問)’으로 잘못 안다.근사하게 묻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이 기괴한 주장이 기자 사회에 퍼지며 혀를 ‘끌끌’차는 후배들이 선배 이낙연을 달리 바라보기 시작했다.이 일이 있고 며칠 뒤인 5월 어느날,총리공관 앞 한 식당에서 기자들이 점심을 같이 하며 이 블랙 코미디를 놓고 막걸리 안주로 삼았다.막걸리는 이낙연이 총리가 된 뒤 기자들을 공관으로 불러 다섯가지 덕(德)을 칭송한 술이다.이날 기자들은 오덕(五德)을 갖춘 막걸리를 마시며 이낙연 발언을 안주로 삼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자(記者)는 자고이래(自古以來) 질문하는 놈이다.쓰기 이전에 질문을 던져야 의미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총리와 같이 국민 세금으로 권력과 명예에 더해 부까지 차지한 집권자들은 고금동서 변함없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왜?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공론(公論)의 장(場) 때문이다.기자들이 이낙연 말대로 질문하는데 늘보와 같고,듣는데만 원숭이처럼 재다면 어찌될까.공론의 장이 힘이 센 자와 돈이 많은 자의 말과 권위로 넘쳐 나면 결국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병들어 죽지 않을까?권력자의 사탕과 같은 달콤한 말을 그대로 옮기는 필경사(筆耕士)들이 득세하는 사회에서 과연 숙의 민주주의를 위한 평등하고,공정하고,정의로운 공론은 가능할까?질문은 없고 받아쓰는 기자만 대우받는 사회가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 나라다운 나라와 당당한 공화정을 외쳤던 수천만의 촛불들이 원하는 사람사는 세상일까?그리고 기자들의 입을 틀어 막고 기자의 자유로운 사고를 차단하는 사회가 과연 21세기 민주사회일까,아니면 1980년대 군부 독재사회일까.그는 답해야 한다.

촛불 반정(反正)으로 퇴출된 박근혜 정부시절 유행한 사자성어가 있다.적자생존.생물학이나 사회학에서 거론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라 대통령 어록을 열심히 받아적는 자가 살아 남는다는 말이었다.정말 그랬다.청와대 국무회의나 수석회의를 들어가 보면 장관과 수석 비서관들은 대통령 발언을 속기사보다 더 열심히 받아 적었다.훗날 이 기록들이 국정농단 사건의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물증이 됐으니 역시 웃을 일이다.그런데 촛불반정을 계기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든다는 대명천지에 질문을 필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온 기자들에게 입 닫고 권력자의 말이나 열심히 받아 적으라는 ‘적자생존의 교시’는 정말 크게 웃을 일이다.기자는 매일 글을 쓰며 이 글이 5년 정권이 끝난 뒤에도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나아가 10년후,아니면 100년후 한조각 역사의 파편으로서 의미있는 기록이 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그래서 3년뒤면 세상과 언론계의 잊지못할 웃음거리로 남을 이낙연 발언에 얽힌 일을 기록으로 남긴다.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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