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초대 민선지사 당선
4·19, 5·18 등 현대사 풍파겪어
60년대 3선개헌 반대투쟁 주도
대한민국 청렴정치인 대상 수상
박 전지사는 원주시의원을 지낸 뒤 1960년 민주당 후보로 출마,초대민선지사에 당선됐다.39세의 나이였다.그러나 이듬 해 5·16 군사쿠데타로 공직을 떠나야했다.박 전지사는 이후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주·원성구에 출마 당선됐다.이어 7대와 9,10대의원을 지내며 4선의원을 역임했다.
박 전지사의 정치역정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용차에 올라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던 청년 박영록은 6,70년대 한국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했고 신군부의 탄압을 감내해야했다.초대 민선지사시절 김대중 전대통령이 인제에서 당선된 후 나눈 인연으로 김 전대통령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 당시 사상계 대표를 지낸 장준하 전의원와 함께 신민당의 원외투쟁을 주도했으며 김대중 전대통령,김영삼 전 대통령,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주도했다.이후 신민당 부총재, 평민당 부총재,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시련도 계속됐다.1980년 집권한 신군부는 박 전지사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로 끌고 가 당시 시가 6000만원 남짓의 임야를 18억원으로 둔갑,부정축재자로 낙인찍었다.그 임야는 이봉창 의사 등 순국열사의 애국공원을 만들기 위해 8년간 세비를 아껴 구입한 것이었다.박 전지사는 신군부에 맞서 납세 거부운동을 하다 단전단수 조치, 가택연금까지 당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9년 ‘전두환 군부의 가혹행위 및 재산 강제 헌납행위’에 대해 “국가는 강제헌납토록 한 재산을 반환하고 피해에 대해 적절한 구제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그러나 이 권고는 국회까지 나섰으나 이행되지 않고 있다.
고인은 목숨처럼 여기던 청렴정치를 끝까지 잊지 않았다.고인은 최근 가진 강원도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후배 정치인들을 향해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하는 사람들,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밑으로는 면장에 이르기까지, 또 국회의원, 도의원, 시·군·구 의원 등 모든 정치인과 공직자가 깨끗한 정신으로 청렴정치를 펼쳐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세상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송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