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화천주재 부국장

지난 5월13일.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베이징에서 진행된 ‘아시아문명 대화 대회’에서 뜻밖의 발언을 한다.“중화문명은 포용성을 가지고 발전해왔다.중화민족의 대외 침략의 전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중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발언은,미국의 우월주의를 겨냥한 면이 적지 않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왜곡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도 중국 내에서의 분쟁으로 당연시하는 억지 논리다.

‘동북공정연구프로젝트’로 대표되는 중국의 역사 왜곡은,일본의 역사왜곡과 표출방식은 다르지만 집요하고 치밀하다.중국의 전략지역인 동북지역,특히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동북공정은 2002년부터 5년 동안 이어졌다.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인데,한국과 북한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전제하에 연구는 진행됐다.2007년 공식적인 프로젝트는 완료됐지만 이후에도 백제를 일본에 의지한 국가로 인식하는 등 왜곡된 주장과 연구는 아직 진행형이다.이에 대해 한국사회는 강력히 반발,외교문제화 했다.2004년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했고,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켜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와 함께 중국의 동북공정에 논리적 대응을 하고 있다.

이처럼 양국간에 역사를 두고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한국전 전적지였던 화천에서는 파로호의 명칭 변경을 두고 파문이 일고 있다.파로호는 일제 강점기말인 1944년 북한강 협곡을 막아 만든 인공호수로,깰 파(破)와 오랑캐 로(虜)를 합쳐 ‘오랑캐를 깨부순 호수’라는 뜻이다.이승만 전 대통령이 6·25 전쟁당시였던 1951년 한미연합군이 화천전투에서 중국군에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이고 친필 휘호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이제는 평화의 시대를 열고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냉전의 산물인 파로호를 원래 이름인 대붕호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한류 관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전쟁과 불화의 시대를 걷어내고 평화와 화합의 시대를 열자는 의미에서 설득력을 가진다.화천지역 내에서도 십여년 전부터 이 같은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 화천주민과 지역 사회단체는 냉소적이다.지명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어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유산이라는 시각이다.더구나 바꾸려고 하는 대붕호라는 이름이,우리가 지은 이름인지 강점기에 일제가 지은 이름인지 지금으로선 확인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화천문화원은 “대붕호에 대한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지만 우리가 명명했다는 단서는 찾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파로호를 둘러싼 지역 안팎에서의 뜨거운 논란은 당분간 식지 않을 듯 하다.

지금 한·중·일 3국은 지난 역사를 두고 총칼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중국과 일본은 상식과 논리를 던져버리고 뻔한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기도 한다.파로호 명칭 변경 문제도 이같은 맥락에서 엄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왜곡이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듯,파로호 명칭 변경도 평화와 우호를 바라는 우리의 선의만으로 판단할 사안은 아니다.성급한 결정보다 명칭에 대한 연구와 확인을 거친 뒤에 주민 의견을 모아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놓는 것도 지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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