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전문학교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이자 여성운동가인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6·25 전쟁통인 1951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다.‘그녀’가 소속된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피란민들을 배로 후송하는 활동을 했는데 배의 주인이 ‘그’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0년 서울 명동 YWCA사무실이다.첫째 부인을 병으로 떠나보내고 잇따른 낙선과 가난으로 암흑기를 보내던 ‘그’가 말이 잘통하면서 위안을 주는 ‘그녀’를 찾은 것이다.2년후에 ‘그녀’는 주변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슬하에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는 야당 정치인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망명·구금·납치·연금 등의 고초를 겪은 정치인의 아내가 된 ‘그녀’의 삶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4번의 대권도전과 5번의 죽을 고비,6년의 감옥생활,10년의 망명 및 연금생활을 함께 견뎌냈다.결혼 9일만에 ‘그’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1973년에는 이른바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을 겪었고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부부가 함께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1983년 미국 망명시절 샌프란시스코 강연에서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욕(榮辱)의 반세기’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행한 ‘그녀’,이희호 여사가 6·10항쟁 32주년인 10일 97세의 나이로 소천했다.이 여사는 가족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며 ‘고맙다.존경한다.사랑한다’고 말하자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아주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 하셨다 한다.하늘나라에서도 ‘영원한 동반자’인 김 대통령과 동행하시기를 바란다.

진종인 논설위원 whddls25@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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