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 vs 3천명’ 내평전투…국군의 첫 승리인 춘천대첩의 초석
결사대 47명과 영월화력발전소 사수…양구 주민 2만 명 대피시키고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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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등명해안에 건립된 6.25 남침 사적탑.

6·25 전쟁 69주년을 맞아 역사 속에 숨겨진 강원 경찰의 활약이 재조명되고 있다.

21일 강원지방경찰청에 따르면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의 최초 전사자, 첫 승리인 춘천지구전투의 초석을 마련한 내평전투, 전략적 중요한 거점을 사수한 전투 등 전쟁의 고비마다 강원경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우선 최초의 전사자는 강릉경찰서 소속 전대욱 경사라고 경찰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27세였던 전 경사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등명 해안초소에서 해안경계와 정찰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날 오전 3시께 북한군 945육전대(陸戰隊) 소속 발동선 30척과 어뢰정 4척을 발견한 전 경사는 초동대응을 했으나 북한군의 사격을 받고 초소에서 전사했다.

오전 4시로 알려진 6·25 전쟁 발발시간보다 1시간 빠른 시간이다.

이어 북한군은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했다.

강원 내륙은 북한군 제2사단과 12사단이, 동해안은 제5사단이 일제히 공격했다.

북한군 5사단이 강릉 주문진 방면으로 남침하기 1시간 앞선 새벽 3시에 945육전대는 이미 등명해안에 상륙해 있었다.

북한군의 포격이 아닌 정동진에서의 기습상륙작전으로 6·25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 경사는 경찰과 군을 포함한 6·25 전쟁 최초의 전사자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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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대첩의 밑거름된 내평전투의 현장


이와 함께 6·25 전쟁 초기 국군이 거둔 첫 승리인 춘천지구전투의 초석이 된 내평전투의 중심에는 노종해 경감이 있었다.

38선을 넘은 북한군 2사단은 전략적 요충지인 춘천을 향해 급속도로 남진, 금세 접경지역인 내평리에 닿았다.

내평리를 담당하는 내평지서(지금의 파출소·지구대)에는 노종해 지서장을 비롯한 내평지서원 및 청년단원 등 1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압도적 장비와 화력, 병력을 갖추고 퍼붓는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1시간 이상 교전하며 북한군의 움직임을 묶었다. 경찰관 등 12명은 모두 전사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약 3천 명에 달하는 북한군 2사단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동안 국군 6사단은 춘천 남쪽에 저지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이는 곧 국군의 소양강 방어선 구축 등 춘천지구전투 승리의 초석이 됐다.

6·25 전쟁 당시 국내 유일의 영월화력발전소 사수 명령을 받고 치열한 공방 끝에 순직한 강원전투경찰대 소속 김해수 경감의 활약도 재조명되고 있다.

47명으로 결사대를 편성한 김 경감은 적 73명을 사살했으나 대규모 북한군의 포위 속에 전사했다. 이 전투는 북한군의 영월화력발전소 점령을 지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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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서 교전 중 전사 조관묵 경감 '11월의 호국인물'

1950년 11월 춘천경찰서 양구 파견대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조관묵 경감은 4천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 패잔병의 습격으로부터 양구 주민 2만 명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대피시킨 주역이다.

조 경감은 주민을 대피시킨 뒤 적과 총격전 끝에 장렬히 전사했다.

강원경찰은 경찰 역사바로잡기의 하나로 6·25 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앞장서 국가를 지킨 경찰관을 발굴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호국 경찰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예를 계승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경찰로 거듭나겠다”며 “나라와 국민을 지켰던 경찰 역사를 계속 발굴·현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강원경찰은 오는 24일 2019 내평전투 호국영웅 추념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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