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 자연 속 풍요롭던 농촌, 분단의 상징으로 남겨지다
고성군 절반씩 남·북으로 분할
대강리 교통 중심지로 유서 깊어
강정마을 일대 군사분계선 설정
60여년 적막한 무인마을로 방치
마을 풍경 육안으로 식별 가능


허리짤린 한반도의 현실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 ‘고성’이다.이곳은 분단 이전까지 금강산과 동해가 둘러싼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풍요로운 농촌이자 어촌마을이었다.하지만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군사분계선이 그어진 고성 현내면~수동면 일대가 비무장지대로 대거 포함되면서 민간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지난 60여년간 적막한 무인(無人)마을로 변해버린 고성 비무장지대 내 현내면과 수동면 마을을 2회로 나눠 찾아가 본다.

■남측비무장지대 최북단 마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당시 설정된 이른바 휴전선인 군사분계선(MDL)은 이듬해 9월까지 서쪽 임진강에서 동해까지 총 1292개의 말뚝을 박아 남한과 북한을 갈라놓았다.말뚝은 200~500m 간격을 두고 임진강변에 제1호 표지판이 설치됐고 강원도 고성의 동해안 해변에 마지막 표지판인 1292번째 말뚝이 박혀있다.

현재 군사분계선 마지막 말뚝은 남고성에서 금강산 육로관광코스인 국도 7호선을 타고 가다가 북측으로 진입할 때쯤에 바닷가쪽으로 유엔군 관할을 의미하는 노란색 표지판으로 설치돼 있다.상당수 군사분계선이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옛 행정지명과 지형 등을 고려해 남한과 북한 관할지역으로 나눠졌지만 고성군의 경우 절반이 북한,절반이 남한쪽으로 분할되면서 수많은 마을이 하루아침에 반으로 쪼개지거나 거주불가지역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정전 이후에도 남북한이 비무장지대 철책을 사이에 두고 양쪽 모두 같은 행정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바로 강원도 철원과 함께 고성이 유일하다.이런 이유로 이른바 북측 고성군을 북고성,남측 고성군을 남고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어찌보면 남북분단의 가장 상징적인 지역이자 가장 근접한 총성 없는 전쟁터가 비무장지대 최북단,고성인 셈이다.

■가깝고도 먼 DMZ마을 대강리

남측 비무장지대 내 가장 동쪽이자 북쪽에 위치한 군사분계선은 인제 서화면과 경계를 이루는 고성군 수동면 삼치령에서 시작된다.사천리 일대를 따라 북쪽으로 고미성리~사비리~신대리로 이어지다 덕산리에서 동쪽으로 틀어 당시 지명상 고성면(현 남한행정지명 현내면) 대강리(大康里) 강정(江亭)마을에서 끝난다.군사분계선의 최동북단인 고성 현내면 대강리 일대를 둘러싼 4km 폭의 비무장지대(DMZ)는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지도상 ‘고성군 고성면 대강리’를 중심으로 분할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광섭 고성군향토사학자는 “대강리는 마을이름 그대로 평안하고 풍요로운 마을이었다.고성의 옛 지명이기도 한 안창(安昌)면과 일맥상통한 의미를 담고 있다.바다와 가깝고 농사짓기에도 좋은 기후여건을 지닌 지역이어서 큰 마을을 형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며 “옛 조선사대부가 금강산을 오고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강리를 지나가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마을이다”고 설명한다.실제 대강리에는 조선시대 마차역의 기점이 되었고 1935년 동해북부선이 가로지르는 초구역이 설치된 교통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휴전을 알리는 정전협정에서 동해안 끄트머리 군사분계선의 종점을 일방적으로 고성 대강리 강정마을 일대로 설정하면서 평온했던 마을은 남·북으로 쪼개지고 남·북한 민간인이 거주할 수 없는 분단의 현장으로 남겨져 버렸다.대강리 DMZ 북쪽으로는 선녀와 나무꾼의 설화로 유명한 감호(鑑湖)와 구선봉(九仙峰) 등이 있고 동해안 모래해변에 위치한 포외진리(浦外津里)가 소재해 있다.대강리와 인접한 DMZ 남쪽으로는 지도상 바닷가쪽으로 많은 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송도진리(松島津里)가 있다.이들 지역은 동해안을 따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7호선 주변으로 분포됐고 군사분계선이 없다면 걸어서 1시간 정도면 남북을 오고 다닐 수 있는 근접한 마을이다.특히 올들어 민간인에 제한적으로 개방된 고성 통일전망대(717OP)에서도 대부분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마을의 풍경을 바라 볼 수 있다.

 

 

▲ 고성 통일전망대(717OP)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 내 북녘땅.멀찍이 금강산으로 향하는 국도 7호선이 보이고 구선봉과 감호가 펼쳐져 있다.  최유진
▲ 고성 통일전망대(717OP)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 내 북녘땅.멀찍이 금강산으로 향하는 국도 7호선이 보이고 구선봉과 감호가 펼쳐져 있다. 최유진

 

취재진이 유엔사의 통제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5일 전방초소지역인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지켜본 감호와 구선봉 일대는 안개 낀 흐린 날씨 속에서도 선녀가 놀다갈 정도로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평안한 자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1929년 이병연이 편찬한 지리지 ‘조선환여승람’에는 감호에 대해 ‘구선봉 아래에 있다.흰 모래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푸른 소나무들이 울창하여 참으로 아름답다.호숫가에 양사언(楊士彦) 고택의 터가 남아 있다’고 기술돼 있다.현재도 육안으로 관측해도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마지막 봉우리로 여겨지는 구선봉을 병풍 삼아 감호 주변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평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촌락을 이루는데 더할나위 없이 제격이라는 것을 풍수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에서 집중 논의된 남고성 제진역에서 북측 감호역을 연결하는 동해북부선 개통은 단순히 남북 철도개통의 의미를 넘어 끊겨진 마을의 담장을 허물어 전쟁 이전 평화로운 예전 마을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고성 현내면 대진 출신으로 북고성 고성읍에서 중학교(초급)와 고교(고급)를 졸업한 신현필(86·고성 거주)씨는 “지금은 운행이 중단된 동해북부선을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대강리에서 많은 사람이 기차에 타고 내렸다”며 “대강리에 살던 같은 학급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고 다닌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박창현 chpark@kado.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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