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2586명 살던 마을, 수십만발 포탄세례 속에 잠들다
남북서 ‘수입면’ 명칭 사라져
1930년대 양구 인구 24% 차지
단장의 능선·피의 능선 일대
한국전쟁 사상자 1만5000명
일제시대 형석광 개발 후 발전

▲ 양구 최전방 초소에서 바라본 북측 문등리 일대. 일제강점기 시절 남방한계선 철책 왼쪽너머로 펼쳐진 수입천과 계곡 일대에 형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1만여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유진
▲ 양구 최전방 초소에서 바라본 북측 문등리 일대. 일제강점기 시절 남방한계선 철책 왼쪽너머로 펼쳐진 수입천과 계곡 일대에 형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1만여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유진


# 양구의 DMZ마을 수입면

양구 수입면(水入面)은 대부분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측 4㎞ 구간 내 비무장지대에 포함된 북측지역이다.민간인이 거주할 수 없는 남측 양구군 동면 사태리(沙汰里),비아리(比雅里)와 해안면의 극히 일부지역을 빼면 수입면이 곧 양구의 비무장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수입면은 현재 북한 금강군으로 편입된 미수복지역이다.어찌보면 양구의 반이 북한에 수복된 수입면인 점을 감안하면 양구 역시 고성이나 철원 처럼 행정구역이 DMZ으로 인해 반토막난 ‘분단 군(郡)’이라고 할 수 있다.아이러니하게 북한령인 수입면은 1952년 북한의 군면리 통폐합으로 창도군과 금강군에 분할 편입되면서 폐지됐고 우리나라도 수입면 일부수복지구를 방산면에 편입시키면서 남북 모두 공식적인 행정명으로 ‘수입면’이 사라진 상태다.

 

 

▲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여진 양구 단장의 능선. 
 사진제공=강원대 DMZ HELP 센터
▲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여진 양구 단장의 능선. 사진제공=박도/NARA

 


6·25전쟁으로 인해 사라진 수입면의 면소재지는 현재 수입천을 끼고 휴전선 한복판에서 잠들어 있는 문등리였다.지형상 동북쪽으로 금강산 가는길인 회양군 내금강면,남쪽으로 두타연으로 유명한 양구군 방산면,서쪽으로 철원 김화읍 임남면을 경계로 두고 있다.1930년 조선총독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당시 양구면 인구가 7892명인 반면 수입면 인구는 1만2586명에 달했다.이는 당시 양구 전체인구(5만2124명)의 24%에 이르는 규모다.그 만큼 번창했던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그 중심에 형석광 광부와 인삼 재배농가가 몰렸던 문등리가 있었다.

남측 수입면 문등리~동면 사태리 구간의 산악지역이 한국전쟁의 최대격전지였던 ‘단장의 능선’이다.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이곳에서 아군·적군 포함 최소 1만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끔찍한 전투상황을 ‘HEARTBREAKING RIDGE’라고 표현하면서 ‘단장의 능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사진제공=강원대 DMZ HELP 센터
▲ 양구 수입면 일대옛지도와 1910년대 DMZ마을 분포도. 사진제공=강원대 DMZ HELP 센터


# 형석 광산마을,문등리를 가다

수입면의 면소재지였던 문등리는 북쪽 내금강에서 발원한 수입천을 끼고 1만여명에 달하는 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강원대 DMZ HELP센터가 1910년대 지형도를 토대로 분석한 가옥분포를 보면 수입천 계곡과 국도 31호선을 따라 큰 마을이 분포하고 있었음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문등리 마을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인 단장의 능선이 인접한 험준한 산악지형인 문등리에 시가지가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취재진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삼엄한 남북 비무장지대 내 철책으로 둘러싸인 문등리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지난 달 유엔사의 출입승인절차를 거쳐 현지를 방문했다.군부대 관계자의 안내로 민간인통제선 입구에 설치된 안내초소에서 신원확인을 받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2㎞ 가량을 가면 펜스로 가로막힌 민통선 문등리 방면 차로와 민간에 개방된 두타연의 갈림길이 나온다.펜스의 자물쇠를 열고 진입하는 문등리길은 북한과 맞닿은 철책으로 향하는 길이다.네비게이션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S자형 급경사도로를 타고 4㎞ 가량을 가자 저 멀리 산등성이를 타고 줄지어 늘어선 남측의 경계철책 왼쪽으로 북측에서 흘러내리는 수입천과 대규모 마을을 형성한 문등리 일대가 펼쳐졌다.남측 최전방 초소에서 바라본 DMZ 내 문등리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66년간 민간인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채 전쟁의 상처를 스스로 싸매고 치유하고 있었다.수십만발의 포탄세례 속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이곳에 수 많은 사람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곳곳은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였다.

북측 청송리에서 시작된 수입천은 북쪽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고 군사분계선을 거침없이 지나 남측 철책 밑으로 유유히 흘러내렸다.수입천의 계곡물은 양구군 방산면 두타연과 만나 파라호를 이룬다.취재진을 안내한 군부대 관계자는 “문등리 일대는 북한과 가장 맞닿은 곳인지라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지역”이라며 “지금은 철수했지만 한때 남북한 체제를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대남·대북 확성기 방송이 매일 울려퍼지기도 했다”고 말했다.이어 “북쪽에서 두타연으로 수입천의 물량은 무릎에서 많게는 허리까지 차 오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수입천을 끼고 형성된 문등리는 일제시대 당시 보통학교와 국민학교 경찰주재소 우체국 등이 들어선 행정,교육,산업,교통의 중심지였다.한국전쟁 전까지 2·7일 단위로 5일장이 열렸고 1912년 일본어강습소가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문등리가 이 처럼 큰 규모의 마을을 형성한 배경에는 1929년 형석광(螢石鑛) 개발을 위한 문등광업주식회사가 설립된 데 이어 2차세계대전 발발 이후 일본군이 군수물자용으로 형성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몰라보게 달라졌다.형석은 폭발성이 강해 폭탄원료로 사용됐고 제철제강의 용해원료로 반드시 필요한 고가의 광물이었다.최근에도 일본이 국내 수출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불화수소의 원재료로 알려져 여전히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등광산에는 징용근로자 등이 포함된 500여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숙소까지 갖추고 채탄작업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이 때문에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선술집과 여관이 성업하는 등 산골마을이 팔도사나이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소규모 산업도시를 형성했다.남편과 자식을 강제징용과 징병을 보낸 산골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항일(抗日) 민요인 ‘소화천황(昭和天皇) 반몽상가(半夢喪歌)’란 노래를 전파하며 일제의 착취를 세상에 알려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는 군수물자로 활용한 형석을 빼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금강산철도를 이용하기 위해 두가지 노선의 길을 닦았다.우선 동면 지석리~비아리(비득고개)~수입면 청송리~내금강을 거쳐 말휘역까지 76㎞ 구간의 금강산가는길이다.이 길은 내륙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최단거리 도로인 현재의 국도 31호선이 됐다.또 방산면 송현리~문등리~백현리 마패령~내금강면 상소곤리를 거쳐 말휘역을 잇는 길도 당시에 열렸다.해방 이후 38선 북측을 관할한 옛 소련은 이들 노선으로 일제가 미처 실어나르지 못한 문등리광산의 형석을 뒤늦게 챙겨나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김창환 강원대 DMZ HELP센터장은 “문등리는 통일 이후 남북평화의 거점지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 당시 상황과 기록에 대한 자료확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창현 chpark@kado.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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