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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봉의산 사람들] 1. 프롤로그 봉의산과 두물머리

미아리 못지않은 점성촌…그들은 왜 봉의산을 택했나
해발 301m 아담한 산 불구
몽고 침략·한국전쟁 사연 깊어
‘ 화기’ 품는 할머니 산신령에
산 주변 무속인 100여명 모여
삼운사·석왕사 등 사찰도 자리

김진형 formation@kado.net 2019년 07월 19일 금요일

역술인들이 모여 활동하는 점성촌을 꼽으라면 단연 서울 미아리다.이미 연극무대에 까지 오른 미아리 이야기는 시각장애인들의 구슬픈 삶까지 얹혀져 국민들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그러나 미아리 못지 않게 형성된 점성촌이 춘천에 있다.춘천 봉의산 일대에는 100여년 넘게 점성촌이 자리잡고 있다.춘천의 진산으로 유명한 봉의산에는 사찰까지 포함할 경우 대외적으로 공개된 50여곳의 사찰과 암자,역술인들이 활동 중이다.여기에 개인이 운영하는 곳까지 포함하면 100여개가 넘을 것이라는게 이 곳 역술인들의 분석이다.서울 미아리 점성촌이 이제 20여곳에 불과,초라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면 봉의산 일대 점성촌은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드물 정도로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춘천 봉의산을 중심으로 한 점성촌시리즈를 나누어 싣는다.강원도민일보는 이 기획의 명칭을 ‘신과 함께-봉의산 사람들’로 정했다.소양로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 프롤로그 봉의산과 두물머리


금강산에서 내린 물은 화천을 지나 한강으로 향한다.설악산 계곡에서 시작된 물은 인제를 지나 소양강댐으로 모이고 다시 한강으로 흐른다.금강산과 설악산의 물이 만나는 두물머리,그곳에 봉의산이 자리하고 있다.봉의산은 해발 301m의 아담한 산이다.그러나 산세가 봉황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듯 산의 정기는 사뭇 다르다.봉의산 아래 동이름도 봉황이 서식한다는 의미에서 대나무밭인 죽림(竹林)동이라고 했고 삼천동과 중도 일대에 조성된 대바지강-봉황의 주식이 대나무열매라는 이유로 갈대를 심었다고한다-도 비슷한 이유로 만들어진 지명들이다.

소양2교가 놓여지기 전만해도 봉의산 바로 앞에 위치한 소양1교는 양구,인제 등 내륙과 춘천,서울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번개시장에서 춘천곰탕을 지나 카페 ‘봉의산가는길’로 이어지는 1차선도로는 당시만 해도 서울과 춘천,우두벌과 신북을 지나 양구로 가는 유일한 국도였다.그 국도를 따라 춘천의 경제권이 형성됐다.300m 남짓한 이 아담한 산은 사연도 많았다.몽고가 고려를 침략했을 당시 춘천주민 2000여명이 봉의산에 올라 몽고에 맞섰지만 군졸과 주민 단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한 채 순절했다.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소양교로 넘어오는 북한군을 3일간 저지했고 6·25 전쟁의 첫 승전보를 울렸다.춘천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는 6·25전쟁 3대 전승으로 꼽힌다.

그 산줄기를 따라 강원도청과 강원도의회,한림대,유림의 중심인 향교가 자리하고 있다.도청 바로 옆으로는 태고종 소속인 석왕사가 있고 한림대 동문으로 이어진 후평동으로는 천태종의 춘천지역 말사인 삼운사가 있다.준상이네 집으로 널리 알려진 기와집 골목도 봉의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더 나아가자면 안정효의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그 무대.미군부대 캠프페이지가 들어선 이후 서면 금산리 살던 ‘언례’가 술집주인 ‘용녀’를 따라 터를 잡은 소양로 일대주점,여종업원들의 젓가락장단 소리 낭랑하던 유흥주점들이 빼곡했던그곳이 바로 봉의산 발밑-소양로의 70~80년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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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봉의산 인가

봉의산으로 역술인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봉의산 자락에 터를 잡은 이들은 봉의산의 기막힌 역사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봉의산의 터줏대감격인 ‘천하약수’ 최광석 무당은 “여기는 전쟁터가 있었던 곳이다.수 많은 군인들이 국가를 위해 죽은 곳이기도 하다”며 “절렬한 혼령들이 있기 때문에 기가 굉장히 강하다”고 강조했다.그는 “봉의산은 사방에서 마을이 안고있는 형국이고 산 자체의 기가 좋아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지금은 산맥이 끊겼지만 대룡산의 힘찬 줄기를 타고 내려와 뭉쳐있는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도청 쪽은 양이고 소양 1교는 음이다.산의 후사면 쪽으로 여산신령이 계시기 때문에 무당들이 집단적으로 모인다.여산신은 제자들을 보듬어주고 같이 어울려주는 기운이 있다.그래서 춘천이 안정적인 것”이라고 했다.

봉의산에 정통한 한 역학자도 “한국전쟁 이후 시신을 매장할 곳이 없어 봉의산에 묻었다고 한다”며 “그래서 역술인들이 많고 한반도의 정중앙에 봉의산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물론 현실적인 이유에서 봉의산 일대에 역술인들이 모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소양1교 입구에서 카페 ‘봉의산 가는 길’을 운영 중인 노정균 사장은 “소양로는 철원과 화천,양구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명동 이전에 번성했던 번화가였다”며 “사람들이 빠져나간 이후 임대료가 저렴해지자 노인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점집이라는 것은 서민들이 와서 쉽게 다가갈수 있어야 하는데 조건이 딱 맞아 떨어진다”고 분석했다.그러나 이를 도시공학적으로만 해석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그들이 모이는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춘천시내 한 역학자는 “봉황은 우리나라의 국조를 상징한다.그래서 기가 강할 수 밖에 없다.무당들이 발산하는 화기를 다스리려면 물이 필요한데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인 춘천은 모두가 알다시피 호반의 도시”라고 했다.이 역학자는 “여기에서 여산(女山)신의 특성이 나타난다.어머니의 품처럼 사람을 잘 보듬어주는 것”이라며 “정감록을 살펴보면 지금은 불의 시대다.화를 피하기 위해 무당들이 모인 것이다.봉의산은 생명을 구하는 자리”라고 풀어냈다.바로 그 생명의 자리,봉의산의 역사가 그들로 인해 다시 해석되는 셈이다. 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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