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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한국의 첨단산업을 정밀 조준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물품의 수출규제를 강화하며 경제보복의 제1탄을 발동한 지 4일로 한 달째가 됐다.

최근 한 달 동안 한일 갈등은 특정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국지전 양상에서 전면적 경제전쟁으로의 확전을 향해 치닫는 상황으로 급속히 악화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진구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고 할 만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주요 20개국(G20) 오사카(大阪)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과 열린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 이틀 만인 지난달 1일 180도 달라진 얼굴로 한국 수출규제 강화책 1탄과 2탄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지난달 4일부터 바로 시행된 제1탄은 한국 핵심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중 일본 시장 의존도가 높은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3개 품목의 수출을 통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일본 정부는 신뢰가 깨진 한국과의 ‘수출관리 운용상의 재검토’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 조치는 한국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등으로 비롯된 정치·외교적 갈등에 경제 영역을 끌어들인 것이라는 인식이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확립돼있다.

원재료 조달 능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의 중요 산업 기반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양국 간 쟁점 현안에서 양보를 끌어내는 동시에 한국의 미래산업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제1탄 조치에 한국 정부가 강력히 반발하는 것을 규제책의 효과가 입증된 것으로 판단하고 제2탄으로 준비한 ‘백색국가’(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시행령(정령) 개정을 지난 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밀어붙였다.

새 시행령이 오는 7일 공포 후 21일이 경과한 이달 28일부터 발효하면 식품, 목재를 제외하고 군사적으로 전용할 수 있다고 일본 정부가 판단하는 모든 물품은 한국으로 수출할 때 3개월가량 걸릴 수 있는 건별 허가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실상 양국 간의 원활한 수출입 거래가 막히는 셈이다.

◇ 日 경제보복의 직접적 배경 ‘징용 소송·레이더 논란’

일본 정부는 한국을 타깃으로 한 수출규제 강화 이유로 한국을 더는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는 이유와 무역관리와 관련해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이제껏 한국 측이 납득할 만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이나 한국 정부가 공히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강화 배경으로 지목하는 것은 작년 10월 있었던 한국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이다.

아베 총리와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 등 일본 정부와 여권 고위 인사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3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열린 여야 당수 토론회에서 “약속을 안 지키는 국가를 우대할 수는 없다”고 주장해 징용 배상 판결이 여러 이유 중 하나임을 시사했다.

아베 총리는 한국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현 일본 집권층에서는 이 판결이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의 근간을 깬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말 아베 정부와 함께 도출한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백지화한 것도 일본 측이 얘기하는 신뢰 훼손의 한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작년 12월 동해상에서 발생한 한국 해군 구축함과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간의 갈등과 이어진 진실공방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한국 측은 북한 조난 선박 구조 활동을 하던 상황에서 일본 초계기가 저공으로 위협 비행을 했다고 비난했고, 일본 측은 한국 구축함이 정보수집 활동을 하던 자위대 초계기를 향해 화기 관제 레이더를 가동하는 등 적대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 논란은 양측 주장이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일본 관가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은 ‘초계기 위협비행-레이더 조사(照射)’ 사건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안보 우방인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토록 결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 접점 없이 달리는 평행선…사태 장기화 우려

한일의회외교포럼·한일의원연맹 소속 초당파 의원 10명으로 구성된 국회방일단은 지난달 31일부터 이틀간 일본 여야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 양국 현안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동향을 탐색했다.

그러나 사전 충분한 조율 없이 이뤄진 의원들의 방일은 일본 여당 자민당 2인자로 불리는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의 일방적인 면담 취소로 이어졌고, 이에 격분한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더불어민주당 강창일 의원이 “우리가 거지냐”며 분통을 터트리는 것으로 성과 없이 끝났다.

방일의원단의 일원인 민주평화당 조배숙 의원은 일본 측에선 한국이 1965년 청구권협정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가 많았다며 기본적으로 시각차가 크다는 점을 느꼈다고 했다.

조 의원의 말처럼 한일 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핵심 키워드는 쟁점 현안에 대한 ‘시각차’로 요약할 수 있다.



아베 정부는 한일 관계가 날로 악화하는 것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이전의 한국 정부가 일본과 이룬 합의나 약속을 문재인 정부가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데에 돌리고 있다.

일부 일본 언론의 보도와 현지 소식통들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 집권 후 위안부 합의가 무효가 된 것을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징용배상 판결에 대해선 한일 관계의 근간을 허문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이들 쟁점 현안에서 시각을 바꾸지 않는 한 한국을 압박하는 강경정책을 계속하겠다는 것이 아베 정권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보복 조치를 관장하는 일본 경제산업성 간부는 “문재인 정권이 계속되는 이상 (규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한 것이 지난달 19일 아사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한발짝 더 나아가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71) 전 주한 일본대사가 최근 출간한 책과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 계열 후지TV의 히라이 후미오(平井文夫) 논설위원의 유튜브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거론하며 망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인 셈이다.

이에 대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지난달 18일 한 토크콘서트에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일본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한국 정권에 대해 ‘바꿔보겠다, 바꿔보고 싶다’라는 것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라며 “이는 내정간섭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이런 압박에 대해 문 대통령은 강하게 대응하고 있다. 일본이 지난 2일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키로 확정한 뒤 소집한 긴급 국무회의에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다. 승리의 역사를 만들 것”이라며 극일(克日) 대응을 선언했다.

사태 악화의 책임이 아베 정부에 있음을 적시하고 앞으로 한국 정부가 취할 맞대응의 귀책 사유가 일본에 있음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상황”이라는 다소 격한 표현으로 아베 정부와 타협 없는 싸움을 벌이겠다는 각오를 천명했다.



◇ “보복 악순환 끊고 대화 시작해야”

갈수록 악화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일본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3일 ‘악순환을 걱정한다’는 사설을 통해 아베 정부가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 조치가 한일관계를 지탱해온 정경분리 원칙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한 뒤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 한층 고조할 우려가 있다고 예상했다.

이 신문은 이어 “심각한 점은 한일 정부가 (자국내) 여론을 의식해 상호 비난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라며 양국 정상은 서로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이니치는 또 “역사 인식 등을 둘러싼 갈등은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며 이런 갈등이 경제나 민간교류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위기관리를 하는 것이 정부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가 양국 모두에 상처를 남길 우려가 있다며 철회를 촉구했다.

그러면서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문 대통령 책임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이 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전 정부의 대응을 이어간다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도쿄신문도 “보복의 악순환은 어느 쪽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며 “감정을 억제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우익 성향인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지 않는 ‘전략적 방치’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양국관계가 조기에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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