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은 가족에게 자신의 작품을 필사(筆寫) 하게 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자식에게는 물론 며느리에게도 가족이 되는 조건으로 자신의 작품을 베껴 쓰도록 했다고 한다.10권 분량의 대하소설을 한 자 한 자 베껴 쓴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쉽게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이 엄청난 일을 하도록 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필사시키는 이유는 네 가지라 한다.첫째는 작품을 통해 분단의 민족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고,둘째는 필사를 통해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셋째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행태를 통해 모진 세파(世波)를 헤쳐 나갈 지혜를 얻을 수 있고,넷째는 자신의 사후 판권을 갖게 될 자식이 작품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 필사는 필수 연습이며,필사는 정독(精讀) 중의 정독”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독서의 유익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필사를 독서의 지극한 경지로 봤다.그에게 필사는 그저 작품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글쓰기 역량을 배양할 수 있다는 일반론을 넘어 사후의 판권 관리까지 염두에 둔 매우 개별적이고 치밀한 계산과 원려(遠慮)가 스며있는 것이다.

독서에 만 가지 이익이 있다고 하는데,필사는 그 정수(精髓)다.대충 눈으로 훑는 것과는 다르다.한 자 한 자 확인하고 옮겨 적음으로써 온몸에 각인하고 느끼게 된다.문장의 점 하나,글자의 획 하나 빠뜨려도 안 되는 것이 필사의 과정일 것이다.한 발 한 발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체력의 결정체인 등산과도 흡사하다.멀리서 쳐다보는 것과 산에 오르는 것은 천양지차다.

요즘 필사하기 붐이 이는 모양이다.김해시에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 필사릴레이를 벌이고,용인도서관에서는 필사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한다.원주소설토지사랑회(회장 장옥희)는 2017년부터 회원 14명이 참여한 총 20권 분량의 대하소설 ‘토지’ 필사본을 원주시에 기증했다고 한다.등산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처럼 필사가 정신의 무게중심이 되어 줄 것이다.

김상수 논설실장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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