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록밴드 북한 공연 성사시킨 모르텐 트라비크 감독 인터뷰
“평창 계기로 北과 관계 회복…남북이 대화 나누는 것 자체가 고무적”

▲ '어느 록밴드의 평양 방문'[EBS 제공]
▲ '어느 록밴드의 평양 방문'[EBS 제공]
“비틀스의 노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Across the Universe) 후렴구 ‘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아’(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라는 가사는 북한 정부가 그토록 주장하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선전에서 강조하는 게 자신들은 남한처럼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함을 유지하겠다는 내용인데, 그런 면에서 라이바흐는 북한 권력층의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봅니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은 모르텐 트라비크는 슬로베니아 록밴드 라이바흐의 2015년 평양 공연 후일담을 차분하게 풀어놨다. 라이바흐가 전체주의를 풍자하는 콘셉트를 지닌 밴드인 탓에 자칫 위험해 보였던 이 공연을 성사시킨 사람이 바로 그다.

▲ 모르텐 트라비크 감독
▲ 모르텐 트라비크 감독
노르웨이 출신으로 이른바 ’북한 공인 문화 사절‘인 트라비크 감독은 라이바흐가 평양 무대에 오르기까지 여정을 다큐멘터리 ’어느 록밴드의 평양 방문‘(원제 ’Liberation Day‘)으로 만들었다.

그는 약 10년간 북한 관리들과 문화 협력사업을 진행해 왔지만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7년엔 북한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이후 자신이 북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엮어 ’반역자의 북한 안내서‘(Traitor’s Guide to North Korea)라는 책을 펴냈고, 대북 관계 악화가 자신의 예술 프로젝트에 영향을 끼치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평양, 예술의 기술’(War of Art) 제작에 관여했다. 이 영화는 다음 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아시아 최초로 상영될 예정이다.

최근 마포구 동교동에서 만난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이 관계 회복 계기가 되고 남북·북미정상회담이 긴장 완화에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양각도국제호텔 내 양복점에서 주문 제작한 인민복 차림으로 인터뷰장에 나타난 그는 “서울 오기 이틀 전 북한 관리들과 함께 점심을 할 정도로 지금은 관계를 회복한 상태”라며 “나와 북한과의 신뢰 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말하자면 북한은 협업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년 전 공연에 대해 “저스틴 비버같이 평이한 팝 음악을 북한에 들려주기보다 논쟁적인 밴드를 데려가는 게 큰 의미가 있었다”고 돌아봤다.

“라이바흐가 파시스트라는 뉴스가 나오자 북한에선 다소 긴장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세계적인 미디어의 관심이 큰 임팩트가 있을 거라고 설득했죠. 라이바흐의 평양 공연이 성공하면 많은 사람에게 북한과의 문화적 교류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병원 주사 맞는 것처럼 따끔할 순 있지만 장기적으론 이익이 되는 일이 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트라비크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스웨덴 예테보리음악대학 대표단이 북한 김원균명칭 음악종합학교와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북측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최초의 서방 록밴드 내한 공연이 순조롭고 성공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트라비크와 라이바흐는 북한 당국의 검열로 ‘가리라 백두산으로’를 비롯한 몇몇 곡을 선보이는 데 실패하고 북한 측 요구에 응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라이바흐가 북한의 검열에 굴복하고 되레 이용당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아요. 평양에서 인권유린을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어떤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박수 치지도 않고 못 들은 척할 거예요. 라이바흐처럼 ‘권력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흰개미가 땅굴을 파서 나아가는 것처럼 침투하는 전략이었죠.”

다만 그는 “북한 체제를 전복하려고 예술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분단은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애초에 그가 북한과의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북측에 ‘호기심 많고 재미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서양인”이 아니라는 점을 어필했기 때문이었다.

약 10년간 북한을 15∼20차례 드나들고 북한 정부 당국자들과 전자우편으로 꾸준히 접촉해온 그에게 북한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묻자 “개방적으로 변해가지만 동시에 통제도 심해지는 것 같다”고 답했다.

“공공연하진 않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이 북한에 점점 도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1980년대 중국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이렇게 경제가 개방될수록 정치, 문화적 측면에선 통제가 강화되고 있기도 합니다. 북한 사람들의 사상이 오염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거죠. 표현의 자유가 점점 통제되고 있고, 문화적인 개방의 베이스가 점점 축소되고 있는 게 북한의 상황입니다.”

트라비크는 평창올림픽 이후 급박하게 흘러간 한반도 정세에 대해 “남북 양측이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도 “과연 어떤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지 보고 싶다. 과연 정말 변화를 하는 과정인지, 아니면 계절처럼 지나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트라비크는 검열 문제 때문에 쉽지 않은 상대인 북한과 예술 교류를 이어가는 이유를 “관계 때문이다. 북한과의 관계는 인간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상대에 대해 알아가면서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한과 북한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많은 걸 배워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되죠. 또 저는 남북한 양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다른 방향으로 분리됐다는 사실 자체가 기이한데, 이 자체가 아티스트로서 도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과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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