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문화 또는 문화정치라는 말도 있지만,문화와 정치는 결이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실제로 문화와 정치라는 두 단어를 앞뒤로 바꾸어 연결한 단어,정치문화와 문화정치는 그 함의가 다르다. 그런데 요즈음은 문화와 정치의 경계가 모호해진 듯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문화’의 외연은 꽤나 넓어서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습득되고 공유된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데,이때 정치는 문화라는 범주 속으로 들어온다.그러나 정치인,대중문화 종사자들이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걸 생각하면,이들은 여전히 묘하게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아니 받았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촛불시위를 겪은 후,정치가 문화가 될 수 있고,문화가 정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이제 정치는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이 참여하는,한 개인이 ‘선택하여 즐기는’ 영역이 된 것 같기도 하다.실제로 문화를 선택해 즐기고 향유하듯,정치적 의견을 즐겁고 센스 있게 표출할 수 있는 방법도 많이 늘어났다.대중들은 정치 기사에 추천 버튼을 누르고,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리고,유튜브 등 개인 채널을 만들고,뉴스나 기사를 팩트 체크하고 유머가 더해진 댓글을 단다.그뿐인가,자발적으로 1인 시위,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그 외에 다양한 시위와 집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미디어의 진화,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양식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그런데 여기에는 부작용도 있다.미디어가 발달하고,전달과 공유의 방법과 속도가 빨라지면서,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기사들이 올라오는가 하면 추정,단서 등으로 포장된 그럴듯한 거짓말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호모 폴리티쿠스인 인간은 재미있고 흥미를 자극하는 정보들을 선별하여 빠르게 소비하고 유포한다.여기에 ‘사냥감’이 던져지면 게임은 잔혹해진다.가짜 뉴스에 소설적 추정,클릭 수에 눈이 먼 자극적 기사,여기에 전문가의 평론까지 더해지면 호모 폴리티쿠스의 놀이터는 아수라장이 되어간다.이 시점에서,로맹 가리가 생각났다.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죽은 남자.군인에서 외교관으로,다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작가,같은 작가에게는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한 고뇌에 찼던 한 인간.

우리에게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로 알려진 로맹 가리,작가로 살기를 원했던 그는 가짜 뉴스와 자신에게 적의를 가진 평론가들에게 끊임없이 고통당하고 공격받았다.군인 신분으로 작가의 이력을 시작한 그는 대중과 문단의 찬사도 받았지만,끊임없이 비판받고,근거 없는 모함을 받아야 했다.이런 현실에 답답해진 로맹 가리는 자기 자신과 전혀 무관한 로맹 가리와 살고 있다고 하면서,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나는 알코올에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겨우 포도주를 조금 입에 댈 뿐인데,이렇게 말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킬리만자로 산 아래서 위스키 병을 들고 있는 로맹 가리를 만났다.’사교계의 어떤 숙녀는 한 방송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로맹 가리가 고주망태가 되어 우리 집에 왔기에 밖으로 내쫓을 수밖에 없었어요.’…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공의 인물에 대한 얘기지요.”(로맹 가리,‘내 삶의 의미’)

콩쿠르 상까지 수상한 작가였지만,그는 제대로 된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로맹 가리의 어떤 노력도 그를 바라보는 어긋난 시선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그가 필명으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그는 새로운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작가의 이름으로 ‘그로칼랭’을 출간한다.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평단의 찬사가 마법처럼 쏟아진 것이다.로맹 가리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독설을 퍼부었던 평론가는 “시와 다름없는,새롭고 엉뚱하고 기발한 언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내 삶의 의미’)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다.

1975년,로맹 가리는 본명으로 ‘이 경계를 넘어서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를,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나란히 출간했다.뻔한 영화의 결말처럼,에밀 아자르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로맹 가리의 소설은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그뿐인가? ‘자기 앞의 생’에 콩쿠르 상이 수여되었다.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 수상 원칙을 깨고,로맹 가리가 콩쿠르 상을 두 번 받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다.

평론가들은 그냥 싫었던 게 아닐까,어떤 러시아 출신의 글 잘 쓰는 프랑스 작가를.‘그냥 싫다’는 이유 앞에서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하긴,좋고 싫음이라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까지 근거를 요구할 필요는 없다.그냥 좋은 것도 있고,그냥 싫은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그런데 ‘그냥’ 싫은 것이 표현의 자유,전문가의 평가,미디어와 만나면 가공할 만한 폭력이 되는 것 같다.

정치가 대중문화와 만나는 일은 정말 근사한 일이다.정치인,언론인,전문가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독식되었던 영역에 대중들이 플레이어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놀이터로 변모된 것이니 말이다.우리 사회에 만들어진 호모 폴리티쿠스의 놀이터,이전과 비할 바 없이 넓어지고 플레이어도 많아진 이때,이제 우리 스스로 규칙을 만들 필요는 없을까?평화롭고 상상력이 넘치는 놀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유강하 강원대 교수

중국고전문학·신화를 전공했다.지금은 강원대학교에서 인문예술치료를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아름다움,그 불멸의 이야기’,‘고전 다시 쓰기와 문화 리텔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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