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려보는 100년전 3·1운동]

지난 3월 도청사 전면에는 안중근 의사가 쓴 ‘대한독립’ 태극기를 중심으로 도출신 독립운동가 10명의 초상이 대형 현수막으로 걸렸다.권인규·류인석·남궁억·윤희순·이소응·박용만·민긍호·조화벽·이강훈·최양옥.이들 모습이 ‘100년의 함성,평화와 번영으로’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감동을 선사했지만 ‘이름조차 처음 듣는다’는 도민들의 반응들도 적지 않았다.3·1절 100주년이 되어서도 잊혀진 이름들…‘20세기 마지막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철원 출신 이강훈 지사,버선목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핀 양양 출신 조화벽 지사의 이름을 다시 소환해 그 결기를 되살려본다.



■ 독립운동사 기록에 일생을 바치다

>> 청뢰 이강훈 지사
김좌진 장군과 항일투쟁 활동
1933년 천황사절단 암살 모의
해방후 윤봉길 의사 유해  송환
“통일돼야 진정한 독립” 강조

▲ 1933년 3월 17일 거행된 육삼정 의거로 백정기 의사와 함께 체포돼 중국 상하이 일본 영사관 감옥에 투옥된 이강훈 지사.(사진 왼쪽)
▲ 1933년 3월 17일 거행된 육삼정 의거로 백정기 의사와 함께 체포돼 중국 상하이 일본 영사관 감옥에 투옥된 이강훈 지사.(사진 왼쪽)

▲ 1946년 2월 18일 원산공원 환영민중대회에서 연설하는 이강훈 지사.(위쪽 사진)
▲ 1946년 2월 18일 원산공원 환영민중대회에서 연설하는 이강훈 지사.(위쪽 사진)

▲ 이강훈 지사의 모습.
▲ 이강훈 지사의 모습.

▲ 이강훈 지사 영결식 모습.
▲ 이강훈 지사 영결식 모습.


지난 2003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청뢰 이강훈 지사는 3·1운동부터 김좌진 장군과의 항일투쟁,4·19혁명,광복회를 거치면서 굵직한 현대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눈감을 때까지 자신의 안위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걱정했다.

1903년 김화에서 종2품 참판 이기원의 아들로 태어난 이강훈 지사는 1919년 16세에 고향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이듬해 북간도를 통해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총리실에서 사무직으로 1년간 일했다.1924년 북간도 사범학교를 졸업한 이 지사는 백두산 근방의 신창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다 만주일대에서 김좌진 장군이 벌였던 항일투쟁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1929년 한족총연합회에 가입,동북만에서 활약한데 이어 해림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개최해 민립중학 설립에 참여하는 등 교포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1930년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상하이로 건너간 이 선생은 ‘재중국 조선 아나키스트연맹’을 개편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이들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을 결성했다.

1933년 3월 17일에는 백정기 의사 등과 일본 천황의 사절 아리요시를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백범 김구 선생이 제공한 도시락형 폭탄을 휴대하고 백정기 의사와 함께 거사현장에 도착한 이 선생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에 의해 체포된 후 그해 7월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압송돼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같이 의거를 도모했던 백정기 의사가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이 지사는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 10월이 돼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이 선생은 일본에 거주하며 김구 선생과 연락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선생의 유골을 1946년 5월 국내로 송환해 효창공원에 안장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으로 일하다 1960년 귀국해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한 이 지사는 1961년 백범김구선생시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활동을 하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1967년 재귀국한 이 지사는 독립운동사 기록에 일생을 바쳤다.1979년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조사실장,연구실장,편찬실장 등을 역임하며 10권에 달하는 ‘독립운동사’와 20권이 넘는 ‘독립운동사 사료집’을 편찬했으며 ‘해외독립운동사’,’항일독립운동사’,‘무장독립운동사’,‘대한민국임시정부사’ 등을 집필했다.이같은 공을 기려 정부는 지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또한 이 선생은 1988년부터 5년간 제10·11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고령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다.이 선생은 광복회장 시절 “통일이 안되고서는 독립이라고 할 수 없다.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임병순 철원 향토사연구소장은 이 지사가 업적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김화군이 남북으로 갈려 철원군으로 합병되면서 주민들의 관심이 다소 소홀했었다”며 “철원읍의 박용만 선생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분인만큼 이강훈 지사 선양사업은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 목숨 걸고 들여온 독립선언서(조화벽 지사)

>> 양양 조화벽 지사
10대때 독립선언서 양양에 전파
1925년 유관순 오빠와 결혼해
개성·원산서 항일운동 본격 투신
1975년 별세·1990년 건국훈장

▲ 조화벽 지사
▲ 조화벽 지사

▲ 남편 유우석 지사
(유관순 열사 오빠)
▲ 남편 유우석 지사 (유관순 열사 오빠)

▲ 조화벽 지사와 가족들의 모습.
▲ 조화벽 지사와 가족들의 모습.

▲ 1938년 3월 22일 양양정명학원 1회 졸업식의 모습.사진의 둘째줄 맨왼편 한복차림이 조화벽 지사다.
▲ 1938년 3월 22일 양양정명학원 1회 졸업식의 모습.사진의 둘째줄 맨왼편 한복차림이 조화벽 지사다.

양양은 강원도내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3·1운동이 뜨겁게 이어졌던 곳이다.가장 오랜기간 치열하게 일어났으며 신교육을 받은 청년세대와 보수적 지역사회가 결합,조직적으로 진행돼 그 강도 측면에서도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이곳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인물이 바로 10대 당시 독립선언서를 목숨걸고 비밀리에 들여온 조화벽 지사다.그는 사회참여에 눈을 뜨기 시작한 당대 여성들을 대표하는 여성운동가인 동시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운동가였고,애국계몽에 투신한 교육가였다.

1895년 양양 남문리의 개신교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난 조화벽 지사는 원산성경학교와 루씨여학교를 거쳐 개성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호수돈여학교 비밀결사대에서부터 활동했다.개성 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조선총독부가 학생들의 3·1운동 참여를 막기 위해 휴교령을 내리자 양양으로 향했다.고향에도 시국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이었다.일본군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숨긴 곳은 버선목 솜 사이.경원열차와 뱃길로 대포항에 도착한 그는 경찰에 끌려갔지만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지 않아 그대로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피어난 양양 만세운동은 유교와 기독교 등 각 조직을 합치는 계기가 됐다.양양의 군중속에서 사촌동생 조연벽,친구 김정숙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일본군의 검거가 시작되자 농촌 아낙으로 위장하고 한계령을 넘어 양구로 피신해 누에고치를 치기도 했다.이후 다시 개성으로 가서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유관순 열사의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유관순 일가와 연을 맺었다.이미 유관순은 이화학당 진학하기 전인 어릴 적 양양으로 시집 간 고모 집에 놀라갔을 때 조 지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배화여학교로 발령받을때 부모를 잃은 유 열사 동생 인석·관석형제와 함께 경성행 기차에 오르기도 했다.이렇게 오랜기간 이어진 조 지사와 유 열사 가족과의 인연은 유 열사가 숨진 후인 1925년 오빠 유우석과 개성에서 결혼하면서 더욱 깊어졌다.교사 급여 일부를 상해 임시정부 자금으로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본격 투신한다.아들을 얻은 후 시동생들과 함께 양양으로 거처를 옮겨 양양을 유관순 가족에게 제2의 고향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원산 거주 당시에는 선박노동자를 위한 해원상구회 부회장을 맡고,노동자 거주비 인하를 촉구하는 등 노동권익 옹호에 앞장섰고,1932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동교육시설 정명학원에 나서는 등 교육사업에 집중했다.광복 이후 유관순 전기가 영화화,국민적 존경을 받자 남편과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남편과 아들 셋을 모두 앞세워 보낸 후 1975년 별세할 때까지 며느리 김정애씨와 지낸 그는 1990년이 되어서야 남편 함께 사후건국훈장을 받고 애족장에 추서됐다.며느리 김정애도 3·1운동 여성동지회장으로 활동하며 시부모의 유지를 이어갔다.양양감리교회에는 지금도 조화벽의 기도실이 남아있다.

이철수 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조 지사 이외에도 유림대표로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석범 선생을 비롯한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이 선생의 경우 유공자 신청을 했는데도 제외된 상황”이라면서 “지난달 양양 3·1만세운동사를 발간하는 과정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고 말했다.

도내 한 문화원 관계자는 “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전국 단위 독립운동에 미친 중대한 역할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연구성과나 자료 등이 부족하다”며 “정부나 중앙단위 기관 등에서도 정확히 고증,선양할 수 있도록 지역 향토사 측면에서 먼저 집중 연구하고 그 위상에 맞는 대우를 받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여진·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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