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황금들판, 굴곡진 근현대사 속 빛을 잃다
근북면 정전협정 후 남·북 분할
일제강점기 지역 최대 곡창지대
곡식 상당수 철도통해 일본 반출
생태평화공원 통해 관찰 가능

▲ 철원 DMZ생태평화공원 십자탑 탐방로 종착점에서 바라 본 DMZ마을. 군부대 관계자가 민통선 지역인 근북면 유곡리와 율목리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박창현
▲ 철원 DMZ생태평화공원 십자탑 탐방로 종착점에서 바라 본 DMZ마을. 군부대 관계자가 민통선 지역인 근북면 유곡리와 율목리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박창현


남북을 갈라놓고 있는 군사분계선의 한복판에 일제강점기 최대 곡창지대가 숨어있다.1945년 광복전까지 금강산을 오고다니는 전철역이 설치되기도 했다.한국전쟁 당시에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유엔군과 중공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화를 쏟아부은 ‘저격능선전투’와 ‘삼각고지전투’가 펼쳐진 곳이다.그 역사의 현장은 다름아닌 철원군 근북면이다.한국전쟁까지만 해도 김화군이었다.일제강점기에는 드넓은 평야에서 거둬들인 식량이 일본으로 반출된 수탈의 현장이었다.현재는 유곡리에만 제한적으로 주민이 거주하고 대부분 남북의 완충지대인 DMZ 안에 잠들어 있다.남·북한이 철책을 걷어내고 하나가 되는 날,근북면의 역사는 다시 써내려가야 한다.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근북면의 잊혀진 과거를 찾아가 봤다.


#미래의 땅 근북면

근북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김화군 초북면에서 명칭을 변경하고 금곡(金谷),백덕(栢德),유곡(楡谷),율목(栗木),두촌(斗村),성암(城巖),건천(乾川),산현(山峴) 등 8개리로 개편됐다.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이북 관할로 들어간 이후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반쪽으로 쪼개졌다.김화군 12개읍면 중 서면과 근남면 전역은 남한에 수복되었고 1읍6면(김화읍,근북면,근동면,원남면,원북면,원동면,임남면)은 일부지역만 수복되고 일부지역은 완충지대로,일부지역은 이북지역으로 들어갔다.금성,통구,창도,기오 등 4개면 전역은 이북땅으로 찢어졌다.

지리적으로 오성산(五聖山·해발 1062m)이 휴전선 윗쪽인 북한측에 넘어가면서 김화군 면적도 4분의 3정도가 이북땅으로 되었다.이로 인해 1963년 당시 인구가 1만5000여명에 불과했던 김화군은 지역주민의 반발에도 불구,철원군으로 통폐합됐고 자연스럽게 근북면도 철원군으로 편입됐다.단 수복하게 되면 다시 김화군으로 환원한다는 조건이 붙은 임시조치였다.

근북면 8개리 마을도 면소재지인 두촌을 비롯 성암,건천,산현리 등 4개마을은 이북지역으로,금곡,백덕,유곡,율목 등 4개마을은 남한(철원)의 법정리로 관리되고 이다.이중 1973년 통일촌으로 조성된 유곡리만 100여명이 거주하는 행정리로 분류돼 있지만 모든 행정업무는 김화읍에서 관할한다.

 

▲ 6.25한국전쟁 정전협정으로 행정구역이 두동강난 철원군 행정지도.
▲ 6.25한국전쟁 정전협정으로 행정구역이 두동강난 철원군 행정지도.


#잠들어있는 광활한 곡창지대

오성산 앞 평야에 그어진 휴전선을 가로지르는 근북면 두촌리와 율목리,백덕리,금곡리,유곡리 등은 60여년간 민간인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고 미래의 땅으로 남겨져 있다.그나마 최근 철원군과 국방부(3사단)가 철원 DMZ생태평화공원 개발에 나서면서 오랜세월 베일에 쌓였던 근북면 DMZ 마을의 위치와 흔적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게 됐다.

안보관광을 겸한 철원 DMZ생태평화공원 탐방을 원한다면 철원군청을 기준으로 북쪽방면으로 국도 43호선을 따라 김화로 통하는 관문인 갈현(葛峴)고개를 지나 생창리에 위치한 DMZ생태평화공원 방문자센터에서 안내를 받을 수 있다.지난 9일 오후 민간에 개방된 DMZ생태평화공원 십자탑 탐방에 나섰다.십자탑 종착점에서는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이자 전략요충지였던 오성산을 또렷하게 정면으로 볼 수 있다.십자탑에서 바라본 근북면 일대 비무장지대는 1~2㎞ 거리로 근접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남북의 철책과 경비초소(GP)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살벌한 휴전의 현장을 느낄 수 있다.이날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 십자탑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북측을 보고 있는 순간,저 멀리 인공기를 좌우측으로 꽂은 북한초소에서도 취재진을 유심히 지켜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북땅인 오성산 바로 밑에 평화롭게 펼쳐진 금곡리~백덕리 마을의 전경을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봤다.전쟁의 상흔만 없다면 오성산 밑에 위치한 영대(靈臺)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산에 올라 뛰어 놀고 마을주민들은 전철을 타고 금강산으로 즐겁게 소풍을 떠나는 모습이 그려졌다.철원역에서 출발한 금강산전철은 유곡역~백곡역~김화역을 거쳐 내금강까지 116.6㎞ 거리를 4시간 정도 달렸다.기차역이 설치된 백덕리 백동마을에는 형석광산이 운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십자탑에서 왼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근북면에서 유일하게 제한적으로 영농활동을 허가한 유곡리의 논에서 누렇게 익은 벼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 평평한 대지를 가로질러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어진 오성산 끝자락에 율목리가 눈에 들어온다.율목리는 큰 밤나무가 많아 밤생이라고도 했다.율목리에서 군사분계선을 건너뛰어 북측으로 바라보면 옛 근북면사무소가 소재한 두촌리가 아른거린다.두촌리 출신으로 고인이 된 황선로(1931년생)씨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두촌리에는 80호가량이 살았고 한탄강이 근처에 있었다.금강산으로 전철을 타고 수학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근북면의 쌀생산량은 김화군 전체의 70~80%를 차지할 정도로 대단위 곡창지대였다.하지만 일제는 영세한 농민들이 땀흘려 생산한 곡식을 헐값에 사들여 철도를 이용,주로 원산을 통해 반출했다.근북면 주민들은 1945년 8·15광복 후에는 공산치하에 있다가 6·25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을 피해 상당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국군이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마을로 돌아갔지만 폭격으로 집들이 모두 없어져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와 김화읍 학사리 등에 정착했다.당시 9사단은 집을 잃은 주민들을 위해 제방 둑 옆에 포막을 수십개 쳐주었고 1개포막 당 4가구가 들어가 임시거처로 사용했다.이후 학사리뿐만 아니라 와수리,청양리,도창리 등 김화읍 마을 곳곳에도 군인들이 지어준 구호주택이 대거 들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3사단 관계자는 “근북면 일대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북,대남방송이 끊이지 않았던 긴장감이 감도는 최전선”이라며 “비무장지대 내 평야지대를 가로지르는 옛 금강선전철의 철도노선도 대략적으로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박창현 chpar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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