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는 사람,하정우’를 읽고
강혁수 공군 18전투비행단 공보정훈실 일병

▲ 강혁수 공군 18전투비행단 공보정훈실 일병
▲ 강혁수 공군 18전투비행단 공보정훈실 일병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전자담배를 입술에 끼우고 상큼한 향을 머금은 연기를 내뿜으며 내게 말했다.생각난다고,청 사과 맛 담배를 태울 때면 같이 강릉에 놀러 갔을 때가,레몬 맛 담배를 태울 때면 힘들었던 작업이 막 끝났을 때가.여태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쉽사리 공감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그런 나의 태도를 눈치 챈 듯이 친구가 덧붙여 말을 이어나갔다. 지나간 기억들이 그때 내가 피웠던 담배의 맛에 따라 기억이 떠오른다고.

저마다 순간의 느낌을 간직하는 방법이 있다.누군가에겐 냄새가 될 수 있고,또 누군가에겐 촉감,그리고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누군가의 얼굴,심지어는 친구와 같이 담배 맛이 될 수도 있다.내겐 걸음이 그렇다.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지나온 발자국들이 기억들을 되살린다.나는 걸음걸이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많이 걷는다.버스 세 정거장 정도는 곧잘 걸어 다녔고,밤이면 내 발걸음은 조금 더 추진력을 받았다.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면서 사람들이 잘 거닐지 않는 골목길들을 돌아다닐 때면 마치 육신이 분리된 채 영혼만이 떠다니는듯한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그러다보니 평소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살이를 접할 수 있었고 쉽게 지나쳤던 것들도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하루는 신촌에서 술을 마시고 막차가 끊겨 집(혜화역)까지 걸어가야되는 상황이 생긴 적이 있었다.지도를 켜 보니 대략 도보로 4시간 정도가 걸리는 긴 시간이었다.처음에는 시간도 시간인지라 고민을 하다가 택시비를 아낀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얼마만큼 걸었을까,단단히 부푼 힘줄들이 내 종아리를 옭아매고 있음이 느껴져 잠시 쉬었다가 가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DDP(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있는 평평한 구조물에 등을 맞대고 하늘을 바라본 채 잠시 몸을 맡겼다.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 만큼 여유로웠다.항상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에 나 혼자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누워있는 지금 이 순간이 여유롭고 좋았다.밤에 이렇게 혼자 걷다보니 별의 별 경험을 다 해보는구나 싶었다.계속 누워있다 보니 따뜻한 온기가 먼지처럼 덮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침대 위 이불이 생각나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내가 있던 곳을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다시 걸어가자 저만치에 모여 있는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어 발걸음을 옮겨보니 동대문의 도매상인들이 벌써부터 오늘 장사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었다.새벽 3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도로는 다마스와 오토바이로 가득했고 양 손에 보따리를 묵직하게 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특별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또 다른 발자국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이 내겐 특별하게 느껴졌다.궁금했다.다른 사람들은 단순한 이 걸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그때 내가 읽은 책이 바로 ‘걷는 사람, 하정우’다.어디가 간지러운지 모를 내 궁금증을 이 책이 풀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연기파 배우,열정적인,인간미 넘치는,부지런한’내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는 하정우에 대한 모습들이다.스크린 속 그의 모습만을 봐왔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부여한 정의들이 허상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한 수식어들은 어느 정도는 내 마음속에서 뚜렷해졌다고 할 수 있다.책은 수필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읽다 보면 그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완전한 자신의 말투로 글을 썼다는 것을 그가 나온 영화 몇 편을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나는 그렇게 하정우가 옆에서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듯 책을 읽어 나갔고 ‘걷기’에 대한 서로의 교집합점이 많아 공통된 생각들을 찾아가는 데만 해도 읽는 재미가 있었다.제목 그대로 하정우는 나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걸었다.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은 그에게 있어서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매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었고,여행을 가서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 다니면서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 먹으러 다니는, 걸음 속에 삶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하정우도 말했다.걸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고,그저 그렇게 걸을 뿐이라고,왠지 걷지 않는 날이면 온몸이 근질근질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오죽 하면 그는 ‘걷기 모임’을 직접 꾸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오른쪽 허리춤에 만보기를 채워 놓고 다 같이 걸어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단순한 ‘걷기 모임’일 뿐인데 그 속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존재했고 모임에 속한 사람들 모두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여기에 내가 그들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게 만든 이야기 하나가 있다.하정우와 그의 지인들이 함께 도전하는 하와이에서의 10만보.평소 3만보씩은 걷는 그들의 첫걸음은 가벼웠지만,시간이 점점 지나면서‘이 도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단순히 10만 걸음을 걷는 것 뿐인데’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들이 침묵 속에서 그들 안에 전염처럼 퍼진다.그렇다 해서 입 밖으로 통증을 내뱉는 사람은 없었고,서로의 뒤통수에 시야를 의존한 채 다시 한 번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나간다.그들은 길고 긴 인내 끝에 성공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10만보를 걸었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형성되진 않았다.하정우 또한 그랬다.힘든 여정 이후 엄청난 보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결승선을 통과하니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그가 뿌리내리며 걸었던 걸음들은 양분이 되어 거대한 줄기를 차츰 형성하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까지 나의 지난 2년은,내가 속한 그룹에서 선두로 치고나가기 위한 스퍼트를 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나는 내 무릎이 어떤 상태인지,내가 어디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른 채 존재하지 않는,아니 존재하지 않을 골인점을 향해 그저 앞만 보고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 허상의 반환점에 도착했을 때 즈음에 나는 차츰 속도를 줄여 걸음을 멈췄다.아무도 없었다.심지어 내 이름조차 없었다.그저 여느 사람들과 같이 참가번호만이 배꼽위에 붙여져 있을 뿐이었다.나는 내가 달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라도 다시 내 이름표를 찾고 싶었다.그래서 여행을 떠났다.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떠났다.혼자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갑작스럽게 떠난 여행이라 몸도 마음도 준비되지 않은 채 우린 강릉에 도착했다.숙소도 전날 급하게 잡은 거라서 위치가 썩 좋지는 않았다.바다를 보려면 택시를 타고 족히 10분 넘게 가야 하는 거리였다.내가 굳이 강릉에 간 이유는 내가 바다를,드넓고 푸른 지평선이 펼쳐지는 그런 바다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내게 있어서 그 부분이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어떻게 됐든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고민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난 무엇이 하고 싶은 건지,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들을.백지장 같은 바다와 하늘을 아무리 쳐다봐도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답답했다.빗방울을 머금은 바닷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지만 시원하지 않았다.친구와 가벼운 저녁식사를 마친 뒤,우리에게 남는 건 시간이었던 터라 숙소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나는 괜한 오기가 생겨서 휴대폰 지도 없이 발길이 닿는대로 무작정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그 제안에 친구는 흔쾌히 발걸음을 맞춰 주었다.우린 그렇게 정해져 있지 않은 길로 숙소를 향해 걸어 나갔다.어느 곳으로 가던 길은 나왔다.왼쪽으로 갈지,오른쪽으로 갈지는 그때 드는 마음에 따라 결정했다.그렇게 하염없이 앞만 보며 걷다가 갑자기 친구를 불러 세워 그 자리에 같이 멈춰 섰다.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단순하면서도 재밌는 그런 생각.나는 친구에게 우리 한번 짜잔 하면서 뒤돌아보자고 얘기했다.친구는 별 시답잖은 짓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내 말을 들어주었고 같이 하나,둘을 외치고 뒤를 돌았다. 살인마가 갑자기 튀어 나오거나 귀신이 보이거나 했던 건 아니다.우리가 지나온 길에 홀로 서 있는 가로등이 주황색 불빛을 흘리며 그 주위를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그 옆에는 광막하게 펼쳐진 논밭이 푸른 월광을 하늘로 반사하며 태를 드러내고 있었다.내가 지나온 길은 꽤 아름다웠다. 나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보러 이곳에 왔는데, 지금은 바다를 흉내 내는듯한 이 논밭이 더 좋게만 느껴졌다.조금은 알 것 같았다.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내가 걷는 보폭만큼 나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나는 조금 더 걸어보고 싶었다. 숙소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잊은 채 지나온 발자국에서 이곳의 향기와 지금의 기억들이 머물러 있길 바라며 한걸음 한걸음 꾹꾹 눌러 담아 걸었다.노란색이 좋았고 거친 아스팔트 도로가 좋았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걷다보니 노란색에 눈이 자꾸만 가는 내 자신을 발견했고 도보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내 다리가 보였다.신기하게도 우린 1시간여 만에 숙소를 찾아 도착했고, 친구는 나의 신이 난 걸음을 따라오느라 지쳤는지 들어가기 전 청 사과 맛 전자담배를 피우며 숨을 골랐다.

하정우는 10만보를 걸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채 한걸음씩 내디디며 생각을 정리한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내게 큰 감동을 주거나 교훈을 안겨주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이 책은 나의 지난 발걸음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무의미하지 않았다고 격려해주면서 나와 함께 옆에서 걸어주는 그런 책이었다.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그저 목표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이 아닌 조금 더 의미 있는 발걸음을 자신있게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여름 나를 성장시켜준,현재는 내가 근무를 서고 있는 이 곳 18전비 강릉에서,지금도 나는 오늘 위에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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