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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줍기

이용춘 수필가

데스크 2019년 10월 01일 화요일 8 면
▲ 이용춘 수필가
▲ 이용춘 수필가

내가 열 살쯤 때인 육십년 대에는 먹거리가 귀했다.봄이면 진달래꽃과 아카시아 꽃도 뜯어 먹고 여름에는 남의 집 살구도 서리해 먹었다.

가을이 되면 알밤이 좋은 간식 거리였다.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이십사절기의 하나인 추분(9월 23일경)쯤 되면 토실토실한 알밤이 떨어진다.내가 살았던 동네 뒷동산에 밤나무가 꽤 여러 그루 있었다.알밤이 떨어지는 때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그 곳으로 갔다.산밤이라 작지만 재수좋은 날은 몇 개를 주웠고,동생과 나누어 먹었던 추억이 있다.알밤을 며칠 먹지 않고 모았다가 가을 운동회 때 간식용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 어린 시절의 추억이 행복하기보다는 좀 씁쓸하게 느껴진다.밤 밭에 주인이 지키고 있다가 동네 아이들이 가면 심한 욕설을 하며 쫓아냈다.그런 날은 한 알도 줍지 못하는 재수 없는 날이었다.지금은 밤 밭주인을 이해하지만 그때는 참 야속했다.따지는 말고 떨어진 밤만 주워가라든가 나중에 좀 나누어 줄 테니 밤 밭에 오지말라고 타일렀으면 어땠을까.

윈스턴 처칠의 사관생도 시절 일이다.외출을 할 때는 방 앞에 외출이라는 푯말을 붙여놓아야 하는데,처칠은 급한 일로 그냥 외출을 했다.밖에서 규율부장을 만난 처칠은 푯말을 붙이려 모든 일을 제쳐놓고 부대로 돌아왔다.그런데 푯말이 붙어 있었다.규율부장이 처칠보다 먼저 부대로 돌아와 외출 푯말이 없는 것을 보고 붙여 놓았던 것이다.처칠은 규율부장으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으리라 걱정했는데,어떠한 책망도 없었다.규율부장과 마주쳤는데 씽긋 웃을 뿐 푯말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이후 처칠은 ‘정직’을 좌우명으로 삼았고,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밤 밭이 있다.밭 경계에다 울타리를 쳐 놓았는데,밤나무가 커서 많은 가지가 밖으로 뻗어있다.인근에 사시는 분들이 이 맘 때쯤 되면 이 곳에서 알밤을 줍는다.나도 얼마 전부터 알밤 줍기를 시작했다.몇 그루되지 않아 누가 먼저 주워가면 한 알 조차 못 줍는 때도 있다.그러기에 새벽에 일찍 나가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밤을 줍는다.어떤 날은 이삼십 개를 줍기도 한다.수풀 속에 있는 토실토실한 알밤을 찾았을 때의 행복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또 고마운 것은 알밤을 줍다가 주인을 만났는데,울타리 밖에 떨어진 밤은 주워가도 된다며 넉넉하게 웃으셨다.울타리 밖의 밤나무 가지는 베어 버리면 편할 텐데 이웃이 주워가라고 그대로 놔두는 것 같다.주인의 깊은 배려가 느껴졌다.올해 알밤 줍기가 끝나면 지저분하게 흩어진 밤송이라도 치워 줄 생각이다.내년에도 알밤을 주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내게 알밤 줍기는 추억 줍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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