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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아야 할 것 <1> “어 강릉에 ‘동헌’이 둘이네”

임호민 가톨릭관동대 역사교육과 교수

데스크 2019년 10월 02일 수요일 8 면
▲ 임호민 가톨릭관동대 역사교육과 교수
▲ 임호민 가톨릭관동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세(勢)에 따라 읍격(邑格)을 구분하였는데,강릉은 대도호부(大都護府)로서 상당히 높은 읍격이었다.당시 강릉은 대도호부로서 상당한 규모로 관아 모습을 갖추었고 이것이 조선후기∼일제강점기 초반(1920년대 전후)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그러나 그 이후 전근대 시기의 관아들은 점점 현대식 건물로 신축되거나,도심 도로의 확충 등으로 사라지게 되었고,그나마 보존된 건물은 객사문(국보 51호)과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이었다.강릉 칠사당은 강릉부사가 농업생산의 증대,인구 증가를 위한 정책시행,교육진흥,군정의 엄정한 시행,백성의 부역 균등,공정한 재판,사회풍속 정화 등과 같은 업무를 했던 시사청(視事廳)이다.시사청이란 동헌(東軒)을 말하는데,지방 수령이 행정업무를 주관했던 공간을 말한다.

2000년대 들어와 강릉시청이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면서 칠사당 주변의 옛 관아 터에 대한 발굴 조사와 동시에 전통문화시범도시 조성 차원에서 강릉대도호부 관아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것이란 ‘칠사당’이란 원래의 동헌이 잘 보존되었는데도 불구하고,신축된 관아 건물 중 한 건물에 ‘동헌’이라는 현판(懸板)을 걸고 그 앞에 2층 누각 형태의 강릉대도호부 관아 정문을 신축했던 것이다.

강릉은 전통문화도시이자 문화관광이 활성화된 도시로 그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 강릉대도호부 관아를 여행하고 있고,또 지역에서도 연중 그곳에서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결국 잘못된 고증으로 인해 여행객이나 지역민들에게 잘못된 역사적 사실이 전달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식견 있는 여행객 중 일부는 “어 강릉에 동헌이 둘이네”라는 좀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종종 있다.그들의 반응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분명 뭔가 잘못 복원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분명 조선후기 기록인 ‘명주칠사당기’에 따르면, “주[강릉]에 옛날 시사청이 있었는데,낮고 허물어져 공[김정]이 매죽헌(梅竹軒)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수각을 지었으며,그 터에 16칸 집을 짓고 시사청으로 삼아 헌(軒)을 이름하여 찰미(察眉)라 하고,당을 칠사라 하였으며,헌은 정(情)을 논하고 당은 일을 논하는 곳이라 하고서,그 위에 칠사지목(七事之目)을 각자하여 특별히 교유하는 말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출입할 때 그 밝은 명을 생각하도록 하였다”고 한다.따라서 칠사당이란 명칭의 건물이 지어진 것은 1725년 경이며,기능적인 면에서도 김정이 신축한 칠사당은 강릉부사가 행정업무를 주관하던 시사청 즉 동헌인 것이다.따라서 복원과정에서 신축된 건물,즉 ‘동헌’은 기능적 측면에서 동헌이 아니며,잘 보존되었던 칠사당이 동헌인 것이다.또 복원된 동원 건물 앞 2층 누각 건물 역시 관아 건물 배치 구조 상 다시 고증할 필요가 있다.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철저한 고증 없이 이루어진 복원이 결국 시민들에게 잘못된 역사적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는 누를 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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