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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하의 대중문화평론] ‘우아한 가(家)’와 다섯 마리 벌레

전직 검사·기자·특전사·해커·판사 ‘현대판 오두(五?)’ 씁쓸한 풍자
2000년 전 한비자 과감한 글
언담자·대검자·환어자 등
‘나라 좀먹는 다섯 벌레’ 표현
드라마 ‘우아한 가’ 속 엘리트들
법·통념 넘나들며 재벌 수호 앞장
한비자의 분석과 다르지 않아

데스크 2019년 10월 05일 토요일 12 면

요즘은 현실이 드라마인지,드라마가 현실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드라마 ‘우아한 가(家)’를 보며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이 드라마는 유쾌하면서도 묵직하다,그리고 날카롭다.네 글자의 단순한 제목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아한 패밀리, 그대들은 우아한가?”

이 드라마는 첫 회부터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음주운전을 하고 과속을 해도 결코 구속되지 않는 MC그룹 장남,한강의 요트에서 대담하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모님,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차남의 모습 뒤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오너 리스크,시한폭탄처럼 언제 어디서나 터져 나오는 재벌가의 일탈.그런데 우리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진짜 힘센 이야기는 철저하게 감추어지지.왜냐하면 바로 이들이 있기 때문이지.”

이어서 전문가로 구성된 재벌 관리팀이 소개된다.전직 검사인 법무팀장,전직 기자인 이미지 메이킹 담당,전직 특전사인 경호팀장,전직 해커인 정보팀장,팀의 수장인 전직 판사가 그 구성원들이다.드라마에서 소위 ‘탑’(TOP)라고 불리는 이들은 재벌들의 이익을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 법과 사회적 통념 따위는 가볍게 넘나드는 최고 엘리트들이다.

그들의 팀워크는 완벽하다.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탑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MC그룹 구리공장에서 근무하다 죽은 딸에 대한 산재 신청을 거부 당한 아버지가 고공농성을 벌인다.해커였던 정보팀장은 개인정보를 수집하고,법무팀장은 불법 농성,사유지 침입으로 가중 처벌이 가능하다는 죄명을 단숨에 찾아내며,전직 기자는 언론사의 취재를 막아 사건의 외부 유출을 막는다.탑의 수장은 그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그를 내려오게 하지만,금세 자신의 말을 뒤집고 그를 처벌에 넘긴다.죄책감 따위는 없다.그들의 존재 이유는 최대의 가성비를 추구하는 것이니까.

더 큰 범죄의 은폐를 위해서는 외부의 조력도 필요하다.법무팀장은 기업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덮기 위해 승진에서 탈락한 검사를 회유한다. “이제 검사님 댁은 이곳이 아니라 청담동 아트빌랍니다.…이번 승진에서 탈락했으니 예정대로 지방을 전전하실 겁니까? 중앙지검에서 차장검사 달고 종래에는 검찰총장도 하셔야죠.우리와 손잡으면 가능합니다.내일 아침 검사님 앞으로 살인 사건이 배당될 겁니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 이 거래는 성사된다.부패한 권력과 손잡은 탑의 파워는 점점 막강해진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재미있다는 것이다.이렇게 숨 막히는 내용은 깨알 같은 풍자와 유머 덕분에 반짝인다.물고기에게 금을 입힌 지렁이를 먹이로 주는 장면, 물고기 ‘피카소’의 엄숙한 장례식,비싼 값으로 연주자를 고용하고 비인간적 연주를 요구하는 재벌의 행태는 참담하지만 폭소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는 유쾌한 희비극이다.이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기시감이 들었다.도대체 어디서 봤던 이야기일까.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그 출처는 매일 보고 듣는 뉴스와 이야기였으니까.현실은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목하 진행 중이다.

‘우아한 가’의 이야기는 현실사회의 표절이자 고급진 패러디다.한편 ‘한비자’의 2019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한비자는 나라를 좀먹게 하는 ‘다섯 마리 벌레(오두·五?)’ 라는 과감한 제목으로 글을 썼다. 다섯 마리 벌레는 학자,언담자(言談者),대검자(帶劍者),환어자(患御者),상공지민(商工之民)이다.한비자가 말한 다섯 벌레를 보고 있자니,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싶었다.

학자,수트를 잘 차려입고 나와 그럴싸한 이론과 통계를 들고 나와 점잖게 비판하는 사람이다(사실 나 또한 연구자로서 부끄러울 때가 많다).언담자,언론 종사자이다.언론에 대한 풍자는 지금도 넘치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대검자,‘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다.한비자가 말하는 검을 찬 사람이 조폭인지 검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무리를 모아 자신의 절조를 만들고 이름을 드러나게 한다는 한비자의 설명을 보고 있으면,더 구분이 안 된다.환어자,권력자의 최측근이 되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은 오늘도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상공지민,상공업 종사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짓밟는 비윤리적인 기업인들과 차이가 없다.2019년에 이천년 전의 한비자(韓非子)라니,그런데 그의 분석이 지금도 이렇게 잘 들어맞는다니!

아,그나저나 뉴스 같은 드라마,드라마 같은 뉴스를 보다보니 문득,지난 2017년에 방영했던 ‘비밀의 숲’이 떠올랐다.역시 재벌과 경찰,검찰의 이야기로 촘촘하게 짜인 웰메이드 드라마.종영 후부터 계속된 속편 제작 요청에 응답해 시즌2 제작에 돌입했다고 한다.어떤 사건으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드라마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주인공, 황시목 검사가 무척 기다려진다.


[유강하 강원대 교수]

중국고전문학·신화를 전공했다.지금은 강원대학교에서 인문예술치료를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아름다움,그 불멸의 이야기’,‘고전 다시 쓰기와 문화 리텔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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