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잣까마귀라는 이름도 특이한 새가 있다.부리가 뾰족하고 꼬리가 짧은 것이 특징인 이 새는 가을이면 겨울을 나기 위해 네 개 정도의 과일 씨를 모아 은닉처에 숨겨놓는다고 한다.그런데 그 은닉처의 숫자가 무려 2000개나 되고,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숨겨둔 장소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찾아낸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사람의 뇌는 얼마나 많은 걸 기억하고,어디까지 마음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아빠는 지금 아프다.엄마와 나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변화에 마냥 두렵고 눈물이 나는데,정작 아빠는 아니다.태연하다.아니,입원해 있는 이 기간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다.의학적으로 지능이나 의지,기억 정신적인 능력이 현저하게 감퇴한 것을 말하는 치매.현대인에게 가장 두려운 치매 현상이 아빠에게 나타나 있는데도 부정하고 있다.

“오늘의 가왕은!”

거실에는 주말마다 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사회자는 목소리를 높여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복면을 쓰고 노래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은 관중들은 하나같이 가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하기 시작했다.아빠도 마찬가지였다.호기심이 감돌고 있는 눈이 반짝거렸다.

“누구지?”

아빠가 다급하게 나를 찾았다.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짜증이 앞섰다.사실 나는 이 방송 내용을 모두 알고 있다. 저 가면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다음에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다음에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부를지도,어떻게 아느냐고?그건 간단하다.이미 이 프로그램을 봤으니까.나뿐만 아니라 물론 아빠도 함께.

“아 진짜,며칠 전에 봤잖아.아빠 혹시 치매 아니야?”

신경질적인 내 대답에 아빠는 머리를 긁적였다.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주말에 같이 앉아 TV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여러 번 느꼈다.항상 같이 재미있게 보고 나서 아빠는 기억하지 못했다.재방송되는 걸 보면서 아빠는 웃었다.이런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그에 따라 엄마와 나의 걱정도 늘어났다.장난삼아 치매가 아니냐는 말에 아빠는 겸연쩍어 하며 웃고 넘어갔다.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데.아빠의 그 맑은 웃음에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치매?내가 아프면 우리 가족은 누가 책임지니.”

아빠는 웃으며 호탕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뒤에서 눈물을 삼키는지는 몰랐다.나는 혼자서 해결하려고만 하는 아빠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았다.조금이라도 기대면 좋을거라고,나는 아빠가 우선이라고,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그러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그런 말을 하면 금방이라도 나 역시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럼 난 또다시 짐이 되는 거다.

아빠가 입원한 병실안으로 들어섰을 때 밝은 햇살이 창문 안으로 비춰들고 있었다.아빠는 때마침 수첩 안의 조그만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어,우리 딸 왔어?”

애써 밝은 목소리였지만 이내 슬픈 눈으로 계속해서 나의 모습을 훑었다.아빠는 혼자서 싸우고 있었다.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항상 밝은 모습만을 보이려고 노력하며 아무한테도 의지하지 않은 채.나는 그것이 더 두려웠다.언젠가 아빠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스쳐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나는 참을 수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가혹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한없이 넓어 보이던 아빠의 어깨가 오늘만큼은 더 왜소해보였다.애써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나는 아빠를 껴안았다.아빠의 몸이 내 품 안에 들어왔다.

“아빠는 절대로 나 잊으면 안돼.알았지?”

카메라나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의 경우 메모리카드 용량이 꽉 차면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다.하지만 아빠는 아니다.아빠는 분명 잣까마귀 그 이상으로 무한히 넓은 저 기억의 공간 속에 머잖아 다시 모든 걸 담아내리라 믿는다.아빠의 입가에 머문 미소를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참고 참았던 하얀 눈물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