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수 논설실장

▲ 김상수 논설실장
▲ 김상수 논설실장
그 무성한 잎은 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나무들이 한파를 견디고 있다.기다려도 원군(援軍)은 오지 않을 것이고,오로지 견뎌야 하는 차가운 시간만이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더 예리해지는 칼바람을 견뎌내고 그 극점을 넘어 더디기 만한 하강의 시간까지 버텨야 우군(友軍)은 손을 잡아 줄 것이다.인정사정없는 시간을 참는 자만이 무정한 계절의 강을 건널 수 있다.

지난여름 무성한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계절이야말로 솔직하고 또 담백해서 좋다.아무 변명도 수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절이다.공자가 나를 알아주는 것도,벌하는 것도 이를 통해서일 것이라고 한 ‘춘추(春秋)’의 문장처럼 겨울은 중언부언이 없어서 좋다.어떤 언설도 가미하지 않고 맨 몸으로 나를 증명하는 것이 이즈음의 나무요,자연이다.

2019년 기해년도 한 달만을 남겨 놓고 있다.이어령 선생은 12월은 차가운 결정의 달이라 말했다.1월의 기대와 2,3월의 준비,4월의 발열과 5,6월의 소란과 소나기 같던 7월의 폭력과 8월과 9월의 허탈,불안한 10월과 여백 같은 정체의 11월에 이어 한 해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 결정하는 달이라는 것이다.1년의 여정을 반추하는 때다.지금 뭔가 꿈꾸거나 도모하지 않아도 좋다.그 무위(無爲)가 주는 안도 같은 것이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결코 되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그 불가항력이 때로는 위안이 되는 것인가.그저 침묵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성취든 과오든 수용하고 다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게 되는 때다.문장을 손보듯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버리고,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는 그 감쇄(減殺)가 주는 전율 같은 것이 있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읽으면 그가 왜 두보(杜甫)와 쌍벽을 이루며 시선(詩仙)으로 불리는지 알게 된다.버리고 또 버려서 나목처럼 세운 문장이 이 계절을 닮았다.그의 ‘정야사(靜夜思·고요한 밤의 생각)’를 조용히 읊어본다.“침상 앞의 밝은 달빛(牀前明月光)/땅 위의 서리런가(疑是地上霜)/고개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다(擧頭望明月)/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低頭思故鄕)”

그 무미의 언어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드러내고,존재의 처음을 떠올리게 한다.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은 일체의 꾸밈을 벗어던지고 자연에 좀 더 가까워지는 때일 것이다.말하는 것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을 침묵하는 것으로 드러내는 법을 알게 한다.예외 없이 혹한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처럼 절제와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대안(對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리라.

노랫말처럼 화려한 시간은 가고 모두가 떠난 자리 달빛은 홀로 차갑고 준엄하다.자연의 본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달빛이다.그 달빛을 바라보며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상상하게 된다.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거치는 동안 잊고 지낸 것을,어둠이 내리고 고요해 진 이 겨울에 와서야 떠올리는가.고향을 생각하는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고,거기 또 다른 시작의 눈(目)이 있다.

12월은 그 바닥을 치고 그 끝을 확인해 보는 때다.오는 7일이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이고,22일은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冬至)다.많은 눈이 내려 발을 묶어놓고 어둠은 깊어 쉽게 밝지 않을 것만 같다.그러나 무심히 깊어가는 시간 속에 반전의 싹이 트고 있다.모든 아침은 그 어둠의 극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안다.추위와 어둠속에 또 한 번 판이 바뀌는 달이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