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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당락이 결정되게 마련이다. 필자가 간산한 많은 정치인 선영 중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분들의 선영을 소개한다. 좌청룡 우백호가 잘 생기고, 혈처로 들어오는 입수룡(入首龍)이 좋고, 전면의 조안(朝案)이 멋진 것을 중시(重視)하는 전통풍수의 간법(看法)으로는 당락을 판단할 수 없다. 필자가 체득(體得)한 맥로이론의 회절수가 많고 적음이 승패를 좌우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맥로이론으로 10회절은 되어야 국회의원의 당선이 가능하다.■ 김병주 선영 김병주는 예천에 태어났으나 부모님을 따라 태백과 강릉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육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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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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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객이 정치와 선거를 언급하면 타락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풍수는 고상한 학문이고 신묘한 비술(?術)인데 진흙탕같은 정치판을 입에 올리냐는 질책이다.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풍수 이전에 현실을 살아가는 일상인이며, 일상의 삶에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은 정치이기 때문이다.우리가 풍수의 비조(鼻祖)나 중시조쯤으로 생각하는 도선(道詵)과 무학(無學)은 정치와 깊게 관련된 사람이다. 풍수를 이용해 세상의 변혁을 도모했고 왕조의 개창에도 개입했으니 이보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가 있을까 싶다.풍수를 공부할 때는 오래된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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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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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시작과 더불어 경천동지의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야당 대표의 목숨을 노린 살인 사건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범인은 “이 대표를 죽이려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그가 사용한 칼은 사진만 봐도 소름이 돋는 예리하게 연마한 것이다. 필자가 어릴 적에 들었던 자유당 시절의 무법천지로 돌아간 느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파시즘의 전율을 느끼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테러사건 이후 후속 보도가 이어지고 필자의 머릿속은 이 대표의 선영이 오버랩되었다. 이재명 선영을 다시 찾았다.이 대표의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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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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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연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뉴스는 11월말의 자승스님 입적과 12월말의 한동훈 비대위원장 취임이었다. 두 분의 선영은 필자가 사는 춘천 교외에 있어서 소개한다. 필자는 불교에 문외한이고 자승에 대한 시비공과를 운운할 입장과 식견도 없음을 밝혀둔다. 자승은 1972년 18세의 나이에 해인사에서 지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1974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제30대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 밑에서 불법을 배웠다. 자승은 조계종에 관하여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종단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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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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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의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정부는 1976년 4월 충남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의 현 위치에 대전국립묘지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1979년 4월부터 공사를 본격 착수하여 1985년 11월 13일 전체 면적 약 322만㎡(97만 4천평)의 현 국립대전현충원을 준공하게 된다. 공사기간 중이던 1982년 8월 27일부터 안장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국립대전현충원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 및 순국선열을 모시고 그분들의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고 있다. 대전현충원은 문필봉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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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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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어려운 시절, 스포츠는 사람들에게 흥분과 감동 그리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특히 야구와 축구 종목이 그랬다. 야구와 축구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국민을 열광시켰던 스타들의 선영을 찾아 보았다.장효조(張孝祚, 1956~2011)그에게는 “타격의 달인”, “타격 천재”, “영원한 3할 타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왼손 타자였다.장효조가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구상고에 진학하면서 부터였다. 1973년, 그가 2학년 때 대구상고는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의 우승을 차지한다. 특히 황금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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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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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별세했다.한 때는 승승장구하며 재계 서열 6위까지 올랐던 쌍용그룹이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해 김문(金海 金門)의 선영을 통하여 쌍용의 흥망을 살펴보고자 한다.쌍용의 창업자인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은 1960년대 정(政)·재(財)와 언론계를 주름잡던 거물이었다. 성곡은 1939년 삼공유지(三共油脂)라는 비누공장을 설립하여 사업가로서 첫발을 디뎠다. 1948년 금성방직을 세워 면방직에 진출 이후 고려화재 설립에도 참여해 금융업에 손을 뻗었다. 1953년 동양통신 사장을 그 다음 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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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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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수립된 이래 20대, 13분의 대통령이 있었다. 필자가 간산한 대통령 부인 선영은 모두 8곳 이다. 이 중 4분의 선영을 소개한다. 동기감응(同氣感應)은 풍수의 핵심적 개념이다. 즉, 같은 기운은 서로 감응하니 본인의 선대와 부모를 명당에 모시면 그 좋은 기운이 본인과 후손에게 전해진다.동기감응의 논리에 의하면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에게는 배우자 선영의 풍수적 동기감응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의 선영을 찾는 풍객들의 발길은 이어지지만, 그 배우자의 선영은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관점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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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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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선영 중국 근현대를 통하여 호남성이 배출한 독보적인 인물은 마오쩌둥이다. 필자는 2011년 5월과 2019년 10월 두 차례 마오의 선영을 간산했다. 2011년에는 방문객도 많지 않았고, 마오의 생가까지 택시로 접근할 수 있었다. 다시 가보니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생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주차장을 만들어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마오가 즐겨 먹었던 홍샤오러우(紅燒肉). 전에 들렸던 그 맛집도 찾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 생가. 우중에도 방문객이 넘쳐났다. 생가 안을 보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생가 앞의 연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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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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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 내륙에 자리한 호남성(湖南省)은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면적은 211,800㎢로 남한 면적의 2배가 넘는다. 그 중에서 필자가 다녀온 곳은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를 중심으로 300여㎞의 여정이었다. 중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증국번과 좌종당의 선영을 간산하였다. 악록서원(嶽麓書院). 장사시 악록구 소재.악록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악록서원은 중국 4대 서원중의 하나이다. 북송 초기(976년)에 창건한 이래로 무수한 인재를 배출했으니 증국번·좌종당 등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악록서원이란 현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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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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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인들』의 저자인 허경진 교수는 정조(正祖)의 르네상스를 만든 건 사대부가 아니라 “중인”이었다고 했다. 특히 학문까지 겸비한 역관(譯官)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역관은 조선에서는 신분의 차별을 받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들의 뛰어난 실력을 알아보고 오히려 환대를 받기도 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교역을 통해 많은 재산도 모았다. 장희빈(張禧嬪)의 당숙인 장현(張炫)은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에 끌려갈 때 수행하여 6년을 청(淸)에 머물렀고, 이후 역관의 우두머리로 40년간 북경을 오가며 외교를 도맡았던 출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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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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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묘소.승려인 만해의 묘소가 쌍분인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해는 1920년대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고,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만해를 만났을 때, 인사를 하며 자기를 못 알아보겠냐며 계속 묻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며 외면했다고 한다. 만해는 광복을 1년 앞 두고 입적했다.만해에 대해 일방적 신격화를 저어하는 주장도 있다.“만해는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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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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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묫자리(동구릉)를 정하고 이곳에 올라와서 바라보며 “이제야 근심을 잊겠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망우리(忘憂里).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해발 282m 망우산에는 근·현대를 수 놓은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1933년 망우리 공동묘지로 묘를 쓰기 시작하여 1973년 만장(滿場)으로 폐장했다.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2013년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에는 망우리 인문학길 사이길의 2개 코스가 조성되면서 근현대 역사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망우산은 동구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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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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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할 때 많은 역할을 했으나 짧은 기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기업도 적지 않다. 기업이 무너지면 근로자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심한 경우에는 국민 경제가 타격을 받기도 한다. 그들의 쇠락과 해체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겠으나 풍수적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풍객의 관점이다. 조양상선그룹의 선영을 소개합니다.조양상선을 창업한 사람은 밀양 출신의 박남규이다. 1920년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14세 때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의 고베(神戸)로 갔다. 3년만에 상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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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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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경주. 기원전 57년 그곳에서 나라를 열어 삼국을 통일하고 천 년을 지속했던 신라. 1대 왕인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명의 왕위가 이어졌다.8세기 세계 4대 도시는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중국의 장안(서안), 이슬람제국의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의 서라벌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라벌에는 17만9천 여 호(戶)가 있었으니 호당 5~6명으로 계산하면 서라벌의 인구는 90만~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신라 왕릉 간산에 앞서 드는 생각.조선풍수의 비조(鼻祖)는 도선(道詵, 827~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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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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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康津)은 군(郡)으로 승격한 이래 그 땅이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그대로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12만이 넘던 인구는 오늘날에는 3만3천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진은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초당에서 동북쪽으로 15킬로 떨어진 곳에 내동 마을이 있고, 김재철은 이곳에서 1934년 김경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을은 90호 인가가 있는 비교적 큰 동네였다. 남쪽으로는 완도와 고금도가 마주보고 있는 강진만(康津灣)이 강진의 중심부
일반
손건웅
202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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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있어왔다. 필자는 세도정치가 가능했던 안동김씨의 풍수적 뒷심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고려 개국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하는 신 안동김씨(新安東金氏) 중에서도 경복궁 근처의 장의동에 거주하여 속칭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 불렸던 그들이 세도정치의 핵심이었다.그들 선대의 선영은 풍산(안동) 소산리에 있는데, 12세인 김번(金?)부터 덕소에 모시기 시작했다. 그의 후손들이 훗날 세도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자 김번의 묘소를 대명당 또는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말하는 사람도
일반
손건웅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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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를 언급함에 있어 소치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완결할 수 없다.이 땅의 남종문인화는 두 사람의 합벽(合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소치가 초의 밑에서 그림을 배운지 4년째 되던 1839년, 초의는 추사에게 소치의 그림을 보내 평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추사는 “아니 이와 같은 뛰어난 인재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 즉각 서울로 올려보내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그해 8월, 소치는 서울로 올라와 월성위궁 바깥사랑에 기거하며 추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추사는 소치에게 원말 4대가의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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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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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고 적혀있는데,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세한도는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을 보여준 것이다. 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추사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에서 더욱 감동적인 것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정이 생생히 살아있는 점이다.추사가 세한도를 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귀양살이 5년째인 1844년에 이상적이 연경에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책을 구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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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
202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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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어릴 적 쓴 입춘첩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그가 일곱 살 때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써서 대문에 붙였더니, 지나가던 남인의 재상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굳이 김노경의 집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남인과 서인은 서로 꺼리어 만나지 않는 시절이었다. 김노경에게 입춘첩의 글씨를 누가 쓴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 아이가 썼습니다”라고 답하자 채제공은 “이 아이는 틀림없이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운명은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일반
손건웅
202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