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편집부국장

▲ 이호 편집부국장
▲ 이호 편집부국장
‘치명적 오만’,독일 유력 주간지 슈피겔의 최근 기사 제목이다.슈피겔은 이 기사를 통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아시아권에 대한 서구 사회의 편견을 꼬집었다.그 배경에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아시아 대륙의 집단주의나 유교적 문화에서 배울 것은 거의 없다는 패러다임이 놓여있을 것이라는 분석까지 내놨다.

정작 독일 베를린에선 지금 이동제한령과 접촉금지령이 실시되고 있다.우리의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한층 강화된 통제 조치다.국가차원에서 경찰이 개인의 행동을 단속하는 상황은 의회 민주주의 수준이 남다른 독일에서 가능할까 싶지만 현재 모습이다.시민혁명의 발원지인 프랑스는 대통령이 직접 이동금지령을 발표했다.통행금지가 실시된 것이다.출발선이 다르지만 외형상 한국의 70,80년대 실행된 그 통행금지가 21세기 유럽에서 지금 적용되고 있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

불가피성이 충분히 이유가 되는 사회적 합의 조치지만 민주주의의 후퇴인 것만은 분명하다.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4일(현지시간)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끝나더라도,세계는 그 이전과는 전혀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만으로는 궁금증이 해소되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렇다면 한국은,강원도는 새로운 질서 틀에서 어떤 길로 갈까.세기말적 바이러스 공습이 불러온 민주주의의 퇴행과 개인의 존엄이 우선되는 인류의 진보라는 상반된 가치의 충돌은 코로나 이후 우리 삶에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전쟁과 같은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강력한 통제권을 가진 국가가 있고,자치단체 존재는 갈수록 작아지는 ‘빅브라더’ 체제가 길어지면 재정종속이 심화되고 자치와 분권의 가치 역시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예측가능하다.

한시적이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 기본권까지 제한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헌법 제10조에서 밝힌 5대 기본권 중 자유권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자신이 하고자 하는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리다.사회권은 한마디로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권리다.사회권으로 인해 국민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생활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회전반을 지탱하는 민주적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치명적 바이러스 확산 앞에서 기본권 제한은 불가피한 조치가 됐다.감염병예방법 제49조는 기본권 행사에 보다 강력한 제한을 둔다.감염병이 유행하면 환자가 있거나 병원체에 오염됐다고 인정되는 장소의 일시적 폐쇄가 가능하다.신천지 같은 일부 종교시설 강제 폐쇄의 법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다행히 지금 대다수 국민은 위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정부의 조치를 지지한다.거기에는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했지만 침해하지는 않았다라는 신뢰가 바탕이 되고 있다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한시적’이라는 시간개념이 국민의 이해를 구한 것이라고 본다.

다시 키신저의 WSJ 기고로 돌아가보자.그는 “코로나19 대유행은 시대에 동떨어진 성곽도시의 부활을 촉진시키고 있다”고 우려했다.각 국이 코로나에 대처하면서 국경을 강화하고 무역과 시민들의 이동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영주 중심의 중세 봉건사회’에 비유한 것이다.코로나는 우리를 닫힌 사회 아니면 열린 사회 어디로 끌고 갈까.

코로나가 드리운 대공황의 그림자로 어딜 보더라도 위기만 보이는 상황에서 강원도에 사는 우리에게 기회는 어떤 모습으로 올지 지금 알수는 없다.그렇지만 새로운 질서를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하는 지역단위의 테이블은 필요하지 않을까.또다른 의미의 ‘치명적 오만’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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