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18년(1585), 내 나이 17 세. 나는 김확의 누나 나정과 혼인을 했다. 둘째형 허봉은 2 년 전인 계미년(癸未年, 1583)에 임금을 비판하다가 선조에 의해 멀리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를 당했다. 사람들이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즐겁고 슬픈 일이 다양하게 서로 겹쳤음에도 나는 나름 공부에 매진하여 초시에 입격했다. 오늘 축하연을 하러 목로주점에서 동문수학 친구들과 만났다.

 “운우지정은?”
 “궁금하거든 혼인해 봐.”
 최천건이 미간을 모으며 나를 뜯어보다가 한 마디 더한다.
 “장가를 가면 점잖아 지는구나.”
 미심쩍은 눈을 만들어 임수정이 거들었다.
 “아니, 초시에 입격하면 몸에 힘이 들어가지.”
 나는 일단 겸손하게 받았다.
 “뭘, 초시일 따름인데. 너희는 바로 진사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될 것인즉.”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임현이 이에 맞불을 놓았지만 악의라곤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보지 않고 그대로 은사, 둔사, 처사를 할 거야. 그들에게서 영예와 영리를 초월한 자기 수양의 높은 뜻을 찾을 수 있지 않더냐!”
 내 입격에 어깃장을 놓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웃음 머금은 얼굴로 반론을 폈다.
 “야 이놈들아, 들어봐라! 옛 사람들은 자기 몸만 착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어. 대개 이치를 깊이 공부하여 천하의 변화에 대응하려 했지. 곧 자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라야 공부에 참뜻이 있다 할 것이야.”
 그러나 임수정이 건들건들 다리를 흔들며 재반론을 떠들어댄다.
 “남을 위한 공부라 하며 너처럼 곧 벼슬자리를 탐하겠다는 것은 뭔가 좀 좋게 보이지 않아. 공부와 벼슬자리를 직접 연결하다니. 그야말로 너답다. 결국 상학(上學)보다 하학(下學)에 몰두하겠다는 말씀. 이는 사대부 공부의 하류화가 아닌가?”
 내가 눈을 치켜뜬다. 그러나 웃음이 입가에 뱅글뱅글 도는 것으로였다.
 “어이쿠, 잘났다! 너의 그 논리는 영리를 초월한 큰 포부를 품은 체하고, 속으론 명망을 낚으려 하면서도 벼슬길에는 나오지 않는 사이비 도학자들의 변명이 아니던가?”
 조금 전부터 저쪽 구석에서 나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하나가 있었다. 그 사내가 문득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면목을 찬찬히 살펴보자니 그에게서 호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권필(權韠)이라 하오. 그쪽이 허균인 줄 진즉에 알지요. 나로 말하자면 서강 현석촌(玄石村, 서울 마포구 현석동) 출신인데, 그 곳 섬의 갈대를 표상하여 호를 석주(石洲)로 삼았지요. 핫핫, 얘기 중이지만 나는 허 형의 친구들에게 지지를 던지고 싶소. 친구들처럼 나 또한 부귀와 영리를 일체 마음속에 두지 않고 오직 시주(詩酒)를 즐기려 하오.”
 “대부 집안 자제로서 마땅히 관대를 착용하고 예조에 나아가 인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소?!”
 이런 내 말에 권필의 대거리가 거침없다.
 “하여간 그런 일은 내가 그리 잘하는 편이 못되오. 언젠간 잠시 벼슬길에 나아갈 수도 있으나, 오늘 일단 허균 인형의 벼슬자리 논리에 조금 실망했어요.”
 “좋게 평해 달라고 내가 부탁한 바 있소?”
 “그렇지는 않지요.”
 “그렇다면 한 사람에 대해 홀로 관심을 갖다가 이제 혼자 실망하는 것이 온당하다 보오?”
 순간 권필은 발을 돌려 목로주점을 나서서 핫핫핫 웃으며
 “허 형, 다시 볼 날이 있을 거요.”
라는 뒷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권필, 성격이 당차고 호방한데다 강기가 대단하다. 내 마음에 불을 지르고 홀연히 사라진 그는 무엇인가!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외별당에 거주하는 이달 스승님이 한 기이한 사내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체격이 작았으나 눈이 빛났고, 거리낄 것 없다는 모양새로 걸터앉았던 툇마루에서 일어서며 나에게 반갑다는 표정을 보냈다. 이달 스승님은 마루 위에 서서 그런 사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인사들 하지. 여긴 내 오랜 지인인 이재영(李再榮), 저 친구가 자네가 보고 싶어 하던 허균이야. 얼마 전에 장가도 들고 초시에도 입격했어.”
 “여인(汝仁)이오.”
 하고 사내가 말붙임을 해왔는데, 척 보아도 찢어지게 가난함을 감추기 어려운 행색이라 눈에 든다고 이를 수 없었다.
 “허균이오. 여인이라 하시었소?”
 “나의 자(字)요. 너 여(汝)에 어질 인(仁)을 엮었지. 괜히 여인(女人)일랑은 떠올리지 말길. 할할할.”
 코가 길고, 눈썹이 가늘며, 입은 찢어져 크고, 입술은 얇았다. 무엇보다 재기가 넘치고 말을 잘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오늘은 뭐랄까 헐벗은 각설의 불알같이 오그라들어 궁싯거리며 저잣거리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그 유명한 해주 유연묵(油煙墨, 기름을 태워서 생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구하고 인신(印信, 도장)도 하나 새겨 볼까 하여 서대문 밖 난전을 그야말로 서캐 훑듯 쏘다니는데, 아, 마침 묵갑을 고르시는 익지 선생님을 만나게 됐지 뭐요.”
 “여기 저기 기웃거린다고요? 그럼 기웃거리다가 여기 뭘 얻어먹으러 오셨나?”
 이 말이 실수였는가? 사실 농이었지만, 초면에 그리했으므로 듣는 이에 따라 심하게 비꼬는 투라 느껴지기도 할 말이었다. 이에 이재영은 마치 봉익선(鳳翼煽)을 흔드는 선비모양 손바닥을 몇 번 흔들어 얼굴을 식히다가 말고 갑자기 한 다리를 허공에다가 차올리는 품새를 잡았다. 그러나 나는 여인 이재영을 미워할 이유도 특별한 애정을 가질 까닭도 없었으므로 별 말이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는 그를 다만 멀뚱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한 사내가 외별당으로 들이닥쳤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바로 그 이재영이다. 아니, 이재영 뒤로 네댓 사내들이 이달에게 잠깐 목례하고는 곧장 내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닌가!
 “네가 우리 형님을 욕 보였다고? 그래, 이 자식아! 우린 이리저리 쏘다니며 지낸다. 여기서 자고 저기서 얻어먹는다. 그런데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이런 외침과 함께 주먹이 날아와 내 명치끝을 들이쳤다. 이어 무릎 아래 쪽 족삼리를 집중적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나는 옆으로 넘어져 굴렀다. 식식거리는 숨결 속에
 “아주 썅, 절단을 내라!”
 하는 이재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일어나 한 사내의 멱살을 쥐려는 순간 늑골을 깨는 듯한 발길질에 땅바닥에 쓰러졌다. 미추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이 왔다. 옆으로 뒤틀리다가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 모양이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곧이어 수많은 발길질이 배와 허리와 어깨와 등판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나는
 “당신을 모욕 주려던 것이 아니라.”
 하고 외쳤는데, 이어
 “허면?”
 하고 이재영의 어금니 말소리가 돌아왔다.
 “내 나름의 농이었지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여전히 모욕적 언사야. 얘들아, 더 까라!”
 “예, 형님!”
 무리들이 또 다시 발길질을 하려는 순간 나는 그 중 한 놈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다가 곧장 일어서서 놈의 관자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지만, 주먹이 놈의 몸에 닿기 전에 나는 엄청난 힘의 발길질에 의해 휘청 크게 앞뒤로 흔들리다가 다리가 꼬이면서 땅바닥에 또 나자빠지고 말았다. 사실 나는 그 무렵 다리에 종기가 나 남몰래 고생하는 중이었다. 거기다가 그렇게 얻어맞고 내동댕이쳐졌으니 몸은 물론 정신까지 어질해졌다. 이달 스승이 뭐라 소리치자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 사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가자! 손곡 선생의 제자이니 이쯤 해두자. 이젠 그도 알만 허것지.”
 하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내가 깨어난 다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빛의 아내였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 지난 6월 갑산 배소에서 풀려난 허봉 작은형이 잠깐 보였다.
 갑산으로 귀양 간 지 두 해만에 해금됐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봉 작은형은 한성부 도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따라서 잠시 혼절했다가 깨어난 내가 얼핏 작은형을 보았다는 느낌을 가졌을 따름이지 작은형은 지금 여기에 없다.
 “이렇게 다쳐서 미안하오.”
 그러자 나정이 내 얼굴을 만진다. “서방님, 이참에 한 마디 합니다.”
 “말하오.”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해야 합니다. 술집이나 찻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분이 있다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오늘 객들과 싸운 일이 그렇고, 친구를 지나치게 좋아하고요, 특히 공부함에 있어 염려되는 게 없지 않아요. 대장부가 되어 세상에 나매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 자신에게도 이롭게 해야 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연로할 뿐만 아니라 둘째 형님이 배소에서 풀렸지만 한성부에 들어오지 못하고 저렇게 떠도는 지금, 그리고 요즘 집안이 가난을 면치 못하는 중인데…. 하니, 재주만 믿고 허랑하게 세월을 보내선 안 됩니다.”
 등잔불에 아내 나정의 얼굴이 빛났다. 부지런하고 근실하고 질박하여 꾸밈이 없는 여자다. 나정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한 마디 더 했다.
 “지금은 아파서 그렇다지만 앞으론 부디 공부에 게으름 피우지 마세요. 저의 숙부인(淑夫人, 외명부 당상관 정3품) 첩지가 늦어집니다.” 
 그 말에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파안대소했다. 아내가 아름다웠다.
 “그렇구나! 허나 걱정 마오. 내 곧 벼슬길에 올라 서른 넘어 이녁을 숙부인에 앉힐 터이니. 에헤헤헤.”
 그러면서 나는 공부와 벼슬, 가난과 명예에 관해 스스로 그 근원적 물음을 가슴 속에 키워보았다.

 등잔불이 한 번 흔들리고, 방문 밖에 인기척이 일었다.
 “내 지나는 길에 한 번 보러 왔어. 조카사위도 안에 있는가?”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다가서는 한 사람, 아니 그의 뒤로 새파란 청년 서넛이 등잔불에 노출됐다.
 “아, 외삼촌! 어서 오세요. 얼마만이에요. 제 혼인 때 뵙지 못해 섭섭했는데. 들어오세요. 삼촌네들도 어서 오르세요.”
 나는 엉거주춤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내 또래라 믿어져 아무 의념도 품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나정이 그를 외삼촌이라 하지 않는가.
 “신혼살림이 재미있느냐? 조카사위님은 어디 다치셨나? 아니, 우리 소개를 먼저 해야겠군. 나는 보다시피 장사치야. 저기 운종가(雲從街, 서울 종로) 육의전(六矣廛)의 상인이지. 이 친구는 난전을 보고, 이 친구는 제법 상이 커.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는 사상(私商)이야. 저쪽은 그냥 시만 짓고 술만 처마시지, 하하. 우린 모두 흉허물 없는 동배간이나 진배없어. 자네 또한 우리와 비슷한 연배이니 내 조카사위라도 우리 서로 말을 트지, 그랴.”
 나정의 외삼촌이 그렇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내 누님이 자네 장인어른이신 의금부 도사 김 대(大)자 섭(燮)자의 부인인 심 씨네. 그러니까니 나정은 내 조카이고, 자넨 나 심우영(沈友英)의 조카사위가 되지. 장악정을 지낸 심(沈) 전(銓)자 어른이 내 아버지인데 불행히도 나는 그분의 서자네.”
 아, 얕은 심음과 함께 나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럴 것 없어. 이 땅에 서얼자(庶孼子)가 어디 한두 명이던가. 여기 박응서(朴應犀)는 유명한 박순 대감의 서자이고, 목사 서익의 서자가 여기 서양갑(徐羊甲)일세, 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李慶濬). 박충간의 서자인 형 박치의(朴致毅)와 동생 박치인(朴致仁)도 여기 있구먼.”
 “어떻게 이렇게?”
 “우리 서자들은 가끔 모이지. 언제 만나면 얘길 나눌 기회가 있겠지. 자, 여기 있다. 네 혼인에 외삼촌으로서 그냥 있을 수 있나. 여보게들, 밤이 깊어가고 또 여러 총중이 눈치 채기 전에 일어나 봄세. 갈 길이 멀어.”
 신혼부부에 흥미가 일어 뭉개며 앉아 있으려는 눈치의 사내들을 재촉하며 처외삼촌인 심우영이 엽전 한 꾸러미를 방안에 놓고 일행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로 간에 제대로 예의를 차릴 겨를도 없었다.

 달포 뒤, 삐어진 다리와 터진 종기가 나아갈 즈음에 또 한 사람이 찾아 왔는데, 바로 초희 누님이다. 초희 누님은 열다섯에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가 서소문(西小門) 근처 시가에서 살고 있다. 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 작은형이 두모포(豆毛浦, 서울 옥수동 강가)의 호당(湖堂, 독서당)에 드나들면서 가까워지자 혼담을 추천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초희 누님은 정신, 의식, 문예 등에서 남편을 넘어선 여자였다. 여덟 살에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 너무도 명문이라 그 때 이미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는 초희 누님만 보면 눈물이 앞선다. 오늘도 기운이 하나도 없는 듯 가냘픈 몸에다가 파리한 얼굴에 미소 지으며,
 “네가 아프다기에 왔어.”
 하고 낮게 속삭일 따름이다. 누님이 지은 ‘곡자(哭子)’를 떠올렸다.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소. 서럽고도 서러운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솟았구나.’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통곡과 피눈물로 목이 메네.’라는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며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누님이 딸에 이어 아들 희윤을 잃은 지 벌써 6 년 세월이 흘렀다. 그때 회임 중이어서 ‘뱃속에 어린애 들었지만, 어떻게 무사히 기를 수 있을까.’ 하고 읊었듯, 그 아이 역시 제 누나와 형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누님, 이렇게 미령(靡寧, 병으로 편치 못함)해서야. 지금도 자형은 밖으로 나도나요? 내 언제 만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을!”
 “균아, 그럴 것 없다. 시집살이의 고충이나 남편과의 갈등이 조선 땅에 어디 나뿐이겠니? 그이도 나름 재주 많고 생각도 많은 사람이다.”
 나는 누님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한 순간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이 가슴 저 아래로부터 솟아나 하마터면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초희 누님이 다녀간 다음날, 나는 마음속에 세워 놓은 계획을 마침내 실행하려고 저녁 무렵에 덩치 큰 처남 김확을 불렀다.
 “가자!”
 “다친 다리가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 일단 창전(倉前)으로!”
 “창전이라면 한성부 서부 서강방 창전 말이오? 거긴 뭣하시려고?”
 창전리는 녹봉을 담당하는 광흥창과 왕실 경비를 담당하는 풍저창 앞에 생긴 자연마을이다. 마포에서 만들어진 삼해주(三亥酒)가 넘어와 창전리 주막과 기생집 술독 수백 개에 가득 채워진다. 나와 처남은 이경(二更, 밤 9시부터 11시까지) 즈음 창천에 도착했다.
 “허름한 선술집 뒷방은 아닐 것이고 여기 어느 기생집에….”
 “자형, 도대체 뭘 하자는 거요?!” 
 대답 않은 채 나는 주막과 목로와 받침술집 그리고 몰락한 양반집의 아낙네나 과수댁이 운영하는 내외주점 등 술청들을 서캐 잡듯 뒤졌다. 거리에 거지, 노비, 갖바치, 백정, 거간꾼 그리고 왈짜패가 어슬렁거렸다. 물론 배꾼, 사상, 거상, 중인, 양인, 양반들도 보였다. 주모와 중노미들이 부산하게 몸을 놀리는 주막을 지나 검계(劍契, 조직폭력배)들이 칼자국을 낸 팔과 가슴팍을 드러내 놓고 허리에 칼을 찬 채 입구에 삼엄하게 서 있는 상화방(賞花坊, 창기집)과 색주가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때 길 모퉁이 솟을대문 앞에 조방꾼(창루 등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일시 분명한 사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여기일지도 몰라. 담 밖으로 환하게 등불이 내비추인다. 기예와 학식을 장착한 기생들에게 접대 받을 수 있는 고급 술집일 듯싶다. 기방이란 사실 양반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해진 곳이지만, 그리하여 청렴하고 금욕적인 유교 정신으로 치장한 조선 선비들이 농염한 여자들이 있는 그 기방에 출입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용납되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원칙적인 얘기일 따름이었다.
 안동 김 씨 양반 댁 자제인 우리 자형 김성립이야말로 바로 이런 곳에서 기생을 끼고 음주 가무를 즐길 터. 비록 5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 집안의 출신이지만 배필로서는 도에 넘친 아내인 우리 초희 누님에게 열등감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가리라 믿어지는 자형으로서는 아마도 이런 곳에서 스스로 상처받은 마음을 풀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한 번은 김성립이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고 하고 실제론 기생집에 갔었다. 이를 알고 있던 초희 누님이 기생집에서 즐기는 남편에게 척독(尺牘, 짧은 편지글)을 보냈다. 척독엔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고지접유재 금지접무재).’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는 말이었다. 곧, 그 쪽편지에서 누님은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곧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을 조롱했던 것이다.
 내 오늘 그를 진실로 조롱해야겠어.
 이런 마음을 품고 찾은 기생집이다. 안내하는 조방꾼을 따라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순간, 난데없는 소리. 아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김확과 함께 그 방 앞에 딱 멈춰 섰다. 김성립이닷! 오랜만에 들어보는 유쾌한 웃음소리! 나는 조방꾼을 밀치고 툇마루에 올라서자마자 장지문을 확 열어젖혔다. 거기엔 생각 그대로 몇 친구들과 함께 기름진 술상 앞에서 젊은 양반 김성립이 술을 목구멍에 막 부어넣는 중이었다.
 “자형, 이런 곳에서 보게 됐지만 오랜만에 뵙습니다. 글공부는 마쳤습니까? 묻습니다만, 오늘은 진정 접(接)이오, 첩(妾)이오?”
 그러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주병에서 술을 따라 마시는 나를 보고 성립은 놀라며,
 “어, 처, 처남. 어떻게 여기까지?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하고 외친다.
 “이젠 자형과 이런 곳에서 한 번쯤 담론을 나눌 때가 됐지요.”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성립과 자리를 함께 한 자들이라면 그 깊이를 능히 알 만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자형, 지금 시대의 흐름을 알아요? 아니, 나는 우리 작은형의 귀양살이에 분노하지만, 오늘 일단 정치 얘기는 삼갑시다. 지금은 오직 시와 문장이지요. 자형이 특히 그렇지 않나요? 당장 진사시를 위해 글공부해야 할 때 아닙니까?”
 “하고자 하는 말이 그건가?”
 “들어보세요. 자형은 당시(唐詩)를 알아요? 경서를 얼마나 읽었나요? 거의 매일 기방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이렇게 사실로 드러난 이상 자형은 글공부에도, 가정을 지키는 데에도, 이른바 수신도 제가도 못하고 있음이 증명됐으니, 처남으로서 실로 개탄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송시(宋詩)를 좀 읽지.”
 “그게 답답하다는 겁니다. 이 시대에 ‘문장은 진한이요, 시는 성당이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요? 최경창, 백광훈 그리고 이달 선생님이 추구하는 이른바 삼당학파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처남 말도 일리가 있네만, 그래 당장 과거를 보자면 과체시(科體詩)를 익혀야 하는데, 처남은 그에 자신이 있나?”
 “자형이 과체시에서 시대의 일인자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지요. 자형이 5대 계속 문과에 급제자를 배출한 조선 최고 문벌 출신이니, 특히 할아버지 홍자 도자 어른께서는 진사 장원과 문과 장원을 하셨으며, 부친 첨자 어른도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하던 문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형은 문리가 부족하고 경사를 읽으라면 입을 떼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까?”
 “처남, 그건 직접 경서를 읽는 것을 봐야 알 일이고, 송시 얘기로 돌아가 말하자면, 이(理)의 길에 충실한 송나라 시풍을 알지 않고 어찌 당 시풍만을 그토록 강조하지? 송시적인 이성의 길로도 가야 하지 않나?”
 “아, 그렇습니까? 자형이 말씀하는 그 이성적 인생이란 항차 기방에서 세월만 보내는, 그리하여 초희 누님이 이런 시를 짓게 하는…, 자, 자형 들어보세요. ‘내게 아름다운 비단 한 필이 있어, 먼지를 털어내며 맑은 윤이 났었죠. 봉황새 한 쌍이 마주 보게 수놓아 있어, 반짝이는 그 무늬가 정말 눈부셨지요. 여러 해 장롱 속에 간직하다가, 오늘 아침 임에게 정표로 드립니다. 임의 바지 짓는 거야 아깝지 않지만, 다른 여인 치맛감으로 주지 마세요.’ …들었지요?”
 순간 내 가슴이 울컥했다. 방안의 한량들 또한 마음속에 느끼는 바 없지 않은 듯 조용히 고개 숙이고만 있다.
 “이 시 기억합니까? 다시 말합니다. 자형이 말씀하는 그 이성적 인생이란 아내를 외로움에 울게 하고 여기 이 기방에서 이따위 짓을 하는 겁니까? 거듭 묻습니다. 이게 이성입니까?”
 그리고 나는 김확의 손에 들린 보따리에서 책을 뽑아 주안상 너머 저쪽에 앉은 김성립에게 던졌다.
 “거리가 멉니다. 여기요오. 경서를 직접 읽어 보아야 안다 하셨으니, 그걸 한 번 소리 내 읽어 보세요.”
 날아오는 서책을 엉겁결에 받아든 김성립은 그러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격앙된 감정을 억지로 감추며 얼굴이 뻘겋게 돼 다만 술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나는 김성립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자제할 수 없어 김확에게 눈짓을 한 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빠른 몸놀림으로 와장창 술상을 엎어버리고 기녀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삼경의 끝으로 가는 시각에 창전 거리를 달리며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가녀린 초희 누님, 그리고 집에 돌아올 수 없어 변방만을 떠도는 허봉 작은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달포가 지날 무렵이었다. 이달 스승님이 기거하시는 외별당으로 다가가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의 말소리에 섞인 다른 목소리는 놀랍게도 그 놈, 이재영의 것이었다. 나는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솟았으나, 일단 가슴을 억눌러 참고 기침 소리를 내며 스승님 방으로 들어갔다.
 “다 나았느냐?”
 “예, 헌데 이자는 어찌하여 여길 또 왔습니까? 이재영, 당신 무슨 낯짝으로 이 집에 발을 들여 놓았지? 이제 둘이서만 한 판 붙어 보자.”
 누런 얼굴빛의 이재영을 쏘아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이 철철 넘치는 추레한 모양새 그대로인데,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그 어떤 기세도 느낄 수 없었다. 화를 낼까 하다가 그의 말 내용에 이르러 결코 가볍다 여길 수 없어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선생님, 저는 지금부터 변려문(騈體文)을 공부한다니까요.”
 “변려문을 공부하자면 전고(典故)해야 하고, 전고하자면 끝없는 고전 연구가 따라야 할 것이야. 중화 사람들이 변려문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고 우리 고려에서 이어진 변려문 전통 또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자네가 다시 날카롭게 갈아서 신선하게 써 봐.”
 그리고 이달 스승은 평소와 달리 전혀 새로운 얼굴이 되어 달포 만에 다시 만난 나를 바라보다가 또 잠시 뜸을 드리더니 헛기침과 함께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균아, 지난 시절 나는 한리학관이라는, 서얼들에게 마지못해 주는 그런 벼슬자리가 애초 맘에 들지 않았어. 곧 그것을 버리고 고죽 최경창 그리고 옥봉 백광훈과 어울려 시사, 곧 시모임을 이루었어. 허나 이제 그들은 현재적 인물이 아니잖아. 그들은 저세상으로 가고 나 홀로 남았지. 나 또한 곧 시대의 흐름 뒤로 사라져야 할 인물이 아니던가.”
 “스승님….”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빽빽이 줄을 서 있고, 실제로 여러 차례 더러운 모욕을 가해서 나를 법망에 넣으려 하지 않았더냐. 내 마음은 툭 트여서 정해진 한계가 없지만, 내가 생업에 신경 쓴 적 또한 없지 않으냐. 그리하여 평생토록 몸 붙일 땅이 없이 사방을 유리걸식했으니, 사람들이 나를 천대할 수밖에.”
 “그러나 재액으로 늙어 가시지만, 그것은 진실로 시 때문이 아닙니까. 몸이 곤궁했어도 불후의 명시들이 있으니, 부귀로써 이름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평하니 고맙다. 균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곧 떠나야 한다는 것.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렀어. 건천동과 상곡을 오가며 한 해 이상 머물렀으니. 그리고 특히 네 중형(仲兄)인 미숙(美叔, 허봉)이 없는 이 서울 땅에 미련이 그리 많지 않아.”
 “스승님, 그러면 저는 어쩝니까?” “너도 이젠 나를 떠나야지.”

 여름이 지나간다. 하오에 비가 내리고 밤엔 조금 차다 싶은 바람이 불었다. 서얼 얘기 뒤 ‘곧 떠나리라.’ 하던 이달 스승은 웬일인지 열흘이 지났음에도 외별당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조금 전 나는 대문을 나서서 담장을 따라 걸으며 비구름 지나간 밤하늘의 휘영청 가을 달 아래 오동잎이 떨어지는 모양을 감상한 뒤 외별당으로 시선을 한 번 주고 대문을 다시 들어서려다가 마침 환하게 밝히던 스승님 방의 호롱불이 막 꺼지는 것을 보았다. 스승님이 이제야 주무시는구나, 하고 눈을 돌리려는데, 방문이 열리고, 이달 스승이 밖으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입자(笠子)의 챙 밑으로 남의 기색을 흘겨 살피는 것은 사대부로서 떳떳하고 길한 기상이 아니라는 말을 하던 스승이 그날따라 갓을 눌러 쓰고 주위를 한 차례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느티나무 사이로 빠져나간다. 나는 순간 뭔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도포, 망건, 갓 등 온전한 사인복 차림으로 나서는 사부에게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처연한 분위기가 퍼져 나와 내게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뭐지?! 스스로 조금 엉뚱하다 생각하며 발걸음 소리를 죽여 스승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스승님이 떠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봤으나, 괴나리봇짐을 지지 않았으므로 잠시 어딘가를 다녀오려는 것이라 판단했다.
 한 마장쯤 갔을까. 아니, 두어 마장이 될지도 모른다. 꽤 시간이 걸렸다. 이경이 끝나고 삼경이 시작될 때까지 스승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삼거리가 나오자 오른쪽 길을 잡아 한 세 바탕(한 바탕은 쏜 화살이 미치는 거리)쯤 되는 산길을 오르더니, 한 차례 쉬려는지 분묘 옆에 가 앉는다. 괴괴한 분위기에 조금 으스스했으나, 누추한 외모와는 다른 이달 스승의 정갈한 정신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귀신들이 해코지 할 까닭이 없다는 믿음을 가져 보았다.
 이달 스승님이 다시 걸어 오솔길을 넘어가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번 살핀 다음 달리듯이 걷는다. 급히 좇다가 하마터면 발견될 뻔했다. 분묘와 바위와 소나무 조붓한 길을 지나자 약간의 바람이 스치고 달빛만이 비취는 평지가 나타나고, 그 끝으로 한 채의 초막이 보였다. 스승이 가려는 데가 저곳이리라.
 과연 이달은 서슴지 않고 초막으로 쑥 들어갔고, 곧 바로 나 또한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칠흑처럼 어두운 봉창. 그 안쪽 방안의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시꺼멓고 음침한 느낌의 초막에서 오래된 먼지의 그 매캐한 냄새와 피 비린내와 살이 썩는 냄새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간이나 거리로 보아선 도축장이 있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서울 왕십리 부근)은 아닐 터인데, 하여간 악취가 코를 찌르는 초막 뒤로 몸을 숨겨 뚫린 봉창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림자가 어른거릴 따름 얼굴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거기엔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았다가 손곡 이달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는 듯했다. 이미 더 이상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워낙 캄캄했으므로 방안이 어떤 모양새인지 알 수 없고, 다만 상좌에 이달이 앉고, 그를 중심으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자네도 앉게. 이 땅 백정의 삶이야 곤혹하지만, 이 자리에선 그럴 것 없지. 다 형제이니 허리를 펴고 편히 앉으라 했거늘 자넨 어찌 늘 그 모양인가. 천격을 스스로 넘지 않으면 생애도 항차 그러하거늘.”
 하고 타이르듯 하는데, 사내가 대꾸한다.
 “어르신, 그게 아니라 쇤네는 단지 예로서….”
 “알았네. 그러니 그만 앉고. 자, 모두 모였나?”
 희미한 그림자만이 어른거리는 방안의 형국이라 정황을 알기 어려웠으므로 나는 신경을 귀로 가져갔다. 혹은 킁킁거리고 혹은 헛기침을 하다가 곧 조용해졌다.
 “지난 중종 이래 재지적(在地的) 중소 지주 출신이던 사림파(士林派)는 중앙의 귀족화된 훈구파(勳舊派) 관료 세력과 정치적 사회적 입장이 다르고 하여 추구하는 생각이 상충되었지. 그 상충과 갈등의 첨예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의 사화가 아니었던가. 사림이 많이 희생됐지만, 그럼에도 이후 역사는 토착적 기반 위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시대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으니.”
 손곡 이달이 간단없이 말해 나아가자 방안의 그림자들에 움직임이 없다.
 “성리학이 심화하여 퇴계, 율곡 등 탁월한 학자를 배출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많은 사림에게서 이제 성리학이 경직되게 내버려 뒀다는 것이 문제야. 이로부터 동서 분당이 심해지지 않았나. 이대로 가다가 세월이 지나면 다시 내부 분열이 일어나 이 땅의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될 듯하네.”
 그때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떠 나섰다.
 “지금 조선은 이백 년 역사 속에서 밤하늘의 운석 같은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해간 시대이지만, 동시에 가장 비극적 시대가 될 개연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을 더욱 확연히 하고 서원과 향약을 통해 지배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강화하는 등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절대적 도덕규범으로 확립해 가는 시대입니다. 체제 유지의 사상적 바탕이 된 성리학은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강조하는 정치사상이지만, 이러한 성리학이 조선에 수용되어서는 파벌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형적인 정치 현실을 낳고 있지 않습니까?!”
 논설이 가볍지 않았다. 또 다른 사내의 외침이 숨어 듣는 내게 숨을 멎게 했다.
 “시류에 편승한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동인과 서인에 합류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이어 다시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나는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죽여 가며 듣는데,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들은 듯했다.
 “학문적으로 영남학파인 이황의 주리론이 세를 잃어가고 기호학파 이이, 성혼, 박순 등의 주기론이 설득력을 더해가는 즈음입니다. 이이가 졸거해 사라졌지만 보세요, 이로부터 더욱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두 세력이 첨예하게 갈려서 명태 껍질을 얻고 당사실을 구하여 상처를 처매도 결코 낮지 아니할, 그 짙디짙은 붉고 검은 피로 얼룩진 사화를 또 불러오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내기해도 좋다는 말에 몇 사람이 쿡쿡,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러나 곧 다시 엄정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준비들 하고 있는가?” “예, 그러나 늘 자금이 부족합니다. 이번 모임도 여기 심 행수가 지원했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될 일이 아니고, 특히 시세를 늘 두고 봐야 하므로 결코 가벼이 할 일이 아니라 세력을 더 키워야 하고….”
 “그건 조심할 일이지. 서류들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이달의 이 말에 방안은 몸을 움직이는 소리로 잠시 수선스러워졌다. 그때 탕, 하고 방바닥을 치는 소리가 났다.
 “저쪽에, 지난 계미년에 여진의 이탕개가 침입했을 때 당시 병조 판서였던 이 율곡이 아뢴 계책 가운데 ‘자원하여 육진에 나가 3 년을 근무하는 사람은 서얼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공사의 천인은 양민으로 면천시킨다.’고 했습니다. 허나 저, 저쪽에, 여러 대신들이 이를 그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길 서얼을 허통하게 하자고 한 일에 대해서는 이이가 어찌 그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자기의 서자를 위해서 한 일이겠는가, 하고 전교(傳敎, 임금이 내린 영)했지요.”
 또 다른 그림자가 벌떡 일어서며 역시 말하길 참지 않았다. 그의 목청은 훨씬 컸다.
 “죽일 놈들! 그러므로 왕조의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민의 집단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보아 우리의 지금과 같은 계(契), 아니 시사(詩社)는 더 조직화 대규모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쉬잇, 목소리를 낮춰라. 자네 지금 너무 나서고 있음이야. 그리고 큰 모임을 지속하다간 반드시 외부로 드러날 수 있음을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인즉. 고루거각을 피해 한양 중에서도 굳이 이렇게 궁벽 강촌인 도축장을 찾아 모이는 우리를 모반의 씨앗이라 주장하며 모두를 잡아들여 능지처참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할 일일지언정 그렇게 드틸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나는 알다시피 이젠 서얼로서의 분노와 개탄을 잠재우고 남은 생애를 위해 이 같은 현역으로의 활동을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향후는 자네들이 모색해야 할 것을. 이를 이르고자 오늘 보자 하였네. 사실 한 세대 위인 내가 의도 있어 이 시사를 꾸려 왔으나, 실제로 한 것은 별로 없어. 이젠 자네들이 나서 보게나.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계의 성격을 외부로 유출시켜서는 결단코 안 되이! 나는 일단 내일 한성을 떠나려 하니 그리 알고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세. 여기, 이별주를 한 잔 따르게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술동이에서 표주박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꿀꺽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고,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흐르자 예의 한 사내가 울먹일 듯 이른다.
 “저쪽에, 어르신, 그러면 저희들이 언덕을 잃어.”
 “언덕은 무슨. 늙어가는 몸으로 감연히 발분하여 뜻을 모아 봤지만 이 또한 때에 이르렀음이야.”
 잠시 뒤 손곡 이달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달빛 아래 흰 도포자락을 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어둡고 궁벽한 초막을 떠나 저만큼 멀어져 갔다. 사내들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길 기다린 다음 초막 뒤에서 스승님을 따라 잡으려고 급히 빠져나오다가 나는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코앞에서 육질이 썩는 냄새를 풍기던 소대가리였다. 쿵, 하는 소리가 나자 갑자기 방안은 순간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긴장이 흘렀다. 잠시 뒤 봉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사내들이 순식간에 확, 몰려 나왔다.
 “이놈은 누구야?!”
 한 사내가 넘어져 버둥거리다가 막 일어서는 나의 등을 발로 내리 찍었다. 다른 사내가 허리를 걷어찼다. 또 다른 사내가 내 골통을 내리 밟았다. 그리고 한 사내가 그들을 말렸고, 사립문에 달린 등롱을 가져다가 자신의 얼굴을 불빛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내 얼굴에 바짝 가져다 댔다. 나는 불빛에 얼굴을 찡그렸다. 모두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잠시 뒤 키 작은 그림자 하나가 도끼를 들고 다가와 쳐들고 내리치려는 순간,
 “차, 참아. 저쪽에, 이자는 이달 어르신의 제자야.”
 하고 키 작은 사내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았다. 그 말이 끝나자 처음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서는 나의 얼굴과 가슴팍을 연거푸 힘껏 걷어찼다. 키 작은 사내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신음하듯 말했다.
 “건방진 놈!”
 내 얼굴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어질 듯했으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리의 통증도 참기 어려웠다. 숨이 막히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통증에다가 눈앞이 피로 얼룩져 갔다. 뒤로 다가온 몇 놈이 다시 짓밟는데, 그땐 이미 혼절하여 나는 저항도 외침도 몸부림도 없이 그저 하나의 주검이 되어 뒹굴기만 할 뿐이었다.
 서쪽으로 기운 달빛이 교교히 내리 비추는 벌판에 던져져 그렇게 주검처럼 한 밤을 보내고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이슬로 온 몸이 축축이 젖어가는 새벽녘이었다. 엉금엉금 기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술 취한 사람처럼 흔들거리며 겨우 집으로 돌아와 외별당의 문을 열었을 때 손곡 이달 스승님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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