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소설가 새 장편소설
춘천 배경 지명· 상호 반영
가상도시‘명진’ 근현대사 압축

이순원 소설가
이순원 소설가

#망쪼로(대학로)* 한 귀퉁이 ‘정선할매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닭갈비집 화덕 앞으로 옮겨진다.닭의 뼈를 바르지 않은 채 한 대 두 대 단위로 잘라 팔던 시절.팔호광장 부근 해장국집에서 술국을 먹고 통금 가까운 시간 어깨 부축으로 소양동의 하숙집 ‘초록 지붕’으로 간다.저녁무렵 부산을 떨며 나가는 여자들이 아래층에 모여사는 집이다.

#교도소가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약사동에 있었던 시절.‘진호’는 분지의 폭염 속에 멀리에서도 높이 솟은 망대가 보이는 교도소까지 더운 줄 모르고 걸어간다.그리고 ‘은식이 형’을 만나 소리없이 운다.이디오피아 하우스가 있는 강둑 아래에 드럼통과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지은 간이 술집에서 은식 형의 잔은 공지천이 대신 받아 비워낸다.

#대학 학보사에서는 “새로 뽑은 미다시(표제의 일본말)를 위하여”하고 건배사를 한다.

‘춘천은 가을도 봄’ 본문 일부 인용 및 재구성
* 망조로(亡兆路): 당시 시국을 빗댄 반어적 조어

 

▲ 이순원 작 '춘천은 가을도 봄'.
▲ 이순원 작 '춘천은 가을도 봄'.

[강원도민일보 김여진·김진형 기자]이순원 소설가의 새 장편소설 ‘춘천은 가을도 봄’ 속 장면들의 일부다.1970년대 후반 춘천에 새겨진 아픈 시간과 그 얼룩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회고담이다.지난 1월 김유정문학촌장을 맡아 청춘을 보낸 도시,춘천으로 돌아 온 이순원 작가는 촌장에 취임하면서 “춘천을 무대로 한 가장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그리고 반년만에 소설을 펴냈다.30년 전 쓴 ‘우리들의 석기시대’를 초안으로 다시 쓴 작품이다.제목은 유안진 시인의 시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에서 따 왔다.이 소설가는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이번 소설이 내 마음에 꼽는 1번 작품이 됐다”고 했다.



■ 얼룩도 꽃이었던 그 때의 ‘춘천’

“당시에는 아팠고,무의미한 실패로 여겨졌던 일들이 많았지만 돌아보면 얼룩조차 꽃이었던,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고 작가는 회고한다.

주인공 ‘김진호’는 춘천에 떠밀려온 인물이다.서울 명문 사립대 법대에 입학했다가 시위에 쓰인 “선언문 몇 군데를 유장한 느낌으로 문장을 다듬은 것 외에” 별로 한 일은 없었으나 현장 체포된 후 제적당한다.1년 반 뒤 춘천의 대학으로 온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삶을 택하지만 학보사 기자로 들어가면서 대학생활에 뿌리내린다.주간교수가 ‘미다시’조차 터무니없이 수정해도 일상을 포기하고 치열하게 역사를 기록했던 학보사 기자들은 모두 추억 속 음유시인이었다.

소설 곳곳에 춘천 지명과 상호가 그대로 반영돼 춘천시민이라면 각 장면들을 영화처럼 떠올릴 수 있다.스스로 ‘튀기’라고 칭하는 연인 ‘채주희’는 캠프페이지와 장미촌이라는 특수 공간에서 잉태된 개인의 아픔이자 지역 역사의 한 단면이고,같이 시위를 하다 춘천교도소로 간 은식이 형은 망대 아래 창살에서 청춘을 죽여야 했던 수많은 청춘을 대변한다.소설 속 인물들은 그 성장통 속에서 입체적인 정체성을 찾는다.

강원대 학보사를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의 세밀한 묘사도 인상적이다.당시 학보사에서 활동한 이재수 춘천시장,강원도민일보 김상수 논설실장과 천남수 강원사회조사연구소장,김희정 춘천문화재단 사무처장 등의 실명을 넣기도 한 작가는 “언론의 자유가 없던 당시 푸르름을 잃지 않고 애써온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고마움을 담은 헌사”라고 했다.

▲ 소설의 배경이 된 1980년 당시 강원대 학보사 풍경.
▲ 소설의 배경이 된 1980년 당시 강원대 학보사 풍경.

■ 한국 근현대사를 받아 쓴 공간 ‘명진’

주인공의 고향은 동해안 북쪽의 가상도시 ‘명진’이다.새롭게 그어진 휴전선으로 남쪽에 속하게 된 이 곳에서 ‘가네야마 도갓집’이라고 불리는 양조장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며 한반도를 관통한 근현대사를 압축한다.서울대를 졸업했지만 4·19 시위로 ‘찔뚝이’가 된 후 책 두어권만 품고 사는 시인 당숙,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권력을 계속 좇는 아버지를 통해 혼돈의 시대상을 그려낸다.진호의 아버지가 “친일파의 자식이라는 운명과도 같은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난리덕분이었”고,이에 대해 당숙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친일 역사에 맹목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네야마 가에 베푼 왜곡된 세례”라고 정리해 버린다.

작가의 학창시절은 한 개인의 기억을 넘어 자유를 갈망하고,끊임없이 가치갈등을 벌인 한 세대의 방황과 고민을 대변한다.유신독재와 5공시절을 관통했던 40년전 청춘이 오늘의 청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낙담한 이들에게 작가는 당숙의 목소리를 빌어 “단추가 통속적인 출세를 위해 하나하나 채워 나갈 절차를 말하는게 아니라면 잘못 끼워진 것이 아니다.얼마나 의지를 갖고 끼웠느냐 아니냐 차이지”라고 위로한다.“우리는 이 세계에서 배운 것을 통해서 우리의 다음 세계를 선택하는 거야.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다음 세계는 이 세계와 똑같은 것이지”라는 구절은 따스하지만 날카롭다.

이 작가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동안에는 청춘이구나 싶다.시대를 떠나 청춘은 현재진행형”이라며 “참 음습한 시절이었지만 청춘은 가을도 봄이다.지금의 청춘들도 충분히 공감하도록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여진·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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