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림

나의 레인보우샤크

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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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에 알람이 뜬다.아내의 생일이다.문득,이사를 결심한다.회사에서도 그 생각에 홀리데이 시즌 스타일별 코스팅에 집중할 수 없다.이러다 숫자가 엉키면 실수가 나고 사고가 터진다.이럴 땐 멈추는 게 상책이다.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화장실에 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는다.찾지 않은지 104일째다.그러니까 아내가 죽은 지도 꼭 104일째다.하지만 이제 화장실에 박혀 있는 일도 끝내야 할 것 같다.조금 전에 화장실에서 만난 오규원 팀장이 화장실은 은신처가 될 수 없다며 손을 털고 나갔다.그러니 지금 내가 좁은 변기 위에 엉덩이를 누르고 앉아 인터넷 부동산을 뒤지며 찾는 집은,집이 아닌 은신처일지 모른다.휴대폰에 맞춰진 집들을 구경하자니 답답하다.아무래도 직접 봐야 할 것 같다.결국 점심시간을 이용해 부동산을 찾는다.
 3월 말,더운 날씨도 아닌데 부동산 중개인 최 실장의 얼굴은 땀으로 반짝인다.최 실장은 화장이 번질까봐 손수건으로 땀을 꾹꾹 눌러 닦는다.그럴 때마다 손목에 몇 겹으로 감긴 샛노란 금팔찌가 최 실장의 퉁퉁한 손목을 금방이라도 베어낼 것 같다.나는 최 실장의 잰걸음을 뒤따르다 조금 앞선다.
 경사가 급한 길을 올라 언덕 끝에 다다르자 숨이 찬다.생수라도 사려고 보이는 구멍가게 앞으로 간다.유리문 안으로 고개만 넣어 좁은 구멍가게 안을 살핀다.물건보다 먼지가 더 쌓인 앵글 선반 앞에서 노파가 졸고 있어 생수는 포기한다.한걸음 늦게 도착한 최 실장은 구멍가게 옆 모퉁이에 진지한 궁서체로 적힌 “원효묵정빌라”입구로 들어간다.
 빌라는 붉은 벽돌이 검붉게 타든 지하 1층,지상 3층 건물로 디자인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단단한 직사각형 모양새다.말이 빌라지 그저 오래된 다가구 주택이다.요즘 신축들이 필로티 구조로 주차공간을 확보한 것과 달리 시멘트 마당에 5개의 주차공간이 몬드리안의 추상처럼 기이하게 나눠져 있다.총 9가구 중 4가구는 주차를 포기해야 한다.제비뽑기라도 하라는 것인가? 아님 선착순이거나.
 빛이 들지 않는 북향의 빌라 현관 앞에 서자 온 몸에 찬 기운이 파고든다.예보도 없이 갑작스레 내리는 겨울비에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그런 느낌이다.자연스레 내 손은 겨울을 넘긴 검은색 싱글 모직 코트 단추를 잠근다.덜렁거리던 두 번째 단추가 지하 계단 아래로 떨어진다.아내가 검은 실을 잊고 붉은 실로 엉성하게 달아준 단추.그때 아내에게 짜증냈던 기억이 4개의 구멍마다 박힌 단추였다.떨어진 단추를 찾으러 갈 사이도 없이 어느새 최 실장은 1층 가운데에 위치한 102호 문을 연다.골치 아픈 탁한 냄새가 최 실장을 푹 밀어낸다.
 나는 20여 분 남짓 남은 점심시간을 확인하며 대충 집안을 훑는다.현관 입구 왼쪽에 위치한 화장실 변기 위에는 담배꽁초가 둥둥 떠 있는 페트병이 있다.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먹은 꽁초의 역한 냄새가 파란 타일의 하얀 줄눈마저 까맣게 채운 것 같다.부엌을 겸한 거실 양 끝으로 빛이 들어오는 작은 방과 빛이 들어오지 않는 더 작은 방이 있다.거실은 복도란 이름이 어울린다.3미터가 조금 안될 것 같은 벽의 대부분은 벽걸이 수족관이 차지해 안 그래도 좁은 집이 더 좁아 보인다.
 벽 맞은편 통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뻥 뚫린 시야는 그나마 숨통을 트여준다.멀리 빌딩이 늘어선,그저 도심의 지루한 풍경뿐이다.신혼부부가 산다고 했지만 여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나처럼 아내의 존재가 사라진 집일까? 나도 모르게 코트의 두 번째 단추 구멍을 매만진다.떨어지지 않은 붉은 실 꼬리가 신경 쓰인다.어쩐지 쉽게 결정할 수 없다.그냥 회사 근처 어둑한 오피스텔을 알아볼까 싶다.최 실장은 퇴근 후에 와서 다른 집도 보라고 눈치 있게 권한다.나는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막히지 않으면 10여 분 거리에 있는 회사로 들어간다.
 저녁 7시에 다시 최 실장과 만난다.페인트 냄새가 빠지지 않은 신축 원룸을 보고 돌아간다.새것이라는 이유로 월세가 터무니없이 비싸다.나는 최 실장에게 혼자 묵정 빌라를 잠시 들리겠다고 전한다.아무래도 아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달아 준 모직 코트의 두 번째 단추를 찾고 싶다.내 말을 오해한 최 실장은 빠르게 묵정 빌라 안으로 들어가서 이미 약속한 듯 102호 초인종을 누른다.안에서 눈 밑에 다크써클이 심하게 내려앉은 남자가 나온다.
 남자는 귀찮은 기색 없이 느릿하게,이미 훑은 집안을 공개한다.수명이 다해 갈지 않았다는 형광등 대신 스탠딩 조명하나만 천장을 향해 빛난다.낮에는 느끼지 못했던,벽걸이 수족관의 푸른빛이 거실 가득 넘실거린다.몇 마리 되지 않는 관상어가 너른 바닷속을 돌아다니듯 유유자적 헤엄친다.나도 모르게 수족관에 집중한다.
 붉은 지느러미로 바닥을 훑고 지나는 날렵한 물고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레인보우샤크입니다.”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생기가 옅게 돈다.나는 수족관 이곳저곳을 느리게 훑는다.샤크라는 이름만 거창할 뿐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녀석이다.이 넓은 수족관 안에 레인보우샤크는 단 한 마리뿐이다.
 “그놈은 종족끼리 있으면 공격적으로 변합니다.서로 물어뜯으면서 싸우죠.”
 내 호기심이 남자를 자극한다.레인보우샤크가 수족관 벽면을 따라 끝에서 끝으로 움직이며 붉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바위틈이나 구멍 같은 은신처를 좋아합니다.”
 남자는 레인보우샤크를 쓰다듬듯 붉은 지느러미 앞에서 손가락을 흔든다.남자의 내려간 눈꼬리만 봐도 물고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것 같다.남자가 물고기에 대해 더 말하려는 찰나,최 실장이 거실 통유리창을 가렸던 커튼을 걷어낸다.
 이곳은 낮과 밤의 경계가 선명하다.멀리 고층빌딩들이 낮 동안 숨겨뒀던 화려한 빛을 쏘아댄다.통유리에 비친 수족관 속에서 관상어들이 장애물을 타고 넘듯 빌딩 사이를 헤엄친다.다른 관상어들이 빌딩 높은 곳까지 유영할 때 레인보우샤크만은 높게 올라가지 못하고 붉은 꼬리와 지느러미들을 계속 흐느적거리며 나를 유혹한다.내 귀에서 남자와 최 실장의 대화가 수족관 거품처럼 톡톡 터진다.아내,춘천,선생님,주말부부,갈등,이사…….레인보우샤크가 입을 뻐끔거린다.결정하셨습니까?그리고 수족관 바닥에 장식된 바위 속 은신처로 사라진다.나는 레인보우샤크가 숨은 구멍에 시선을 넣고 대답한다.네,계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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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급하게 이삿짐만 밀어 넣고 바로 호찌민으로 출장을 떠난다.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이유로 파업을 일으켰고 생산라인이 중단됐다.델리를 맞추지 못하면 몇억 불짜리 오더가 날아간다.더 재수 없으면 내 자리도 날아간다.나는 파업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 현지 에이전트를 통해 다른 봉제공장들을 알아본다.공장들을 찾아다닐수록 마음만 다급해진다.다행히 노동자들은 연내 임금조정을 약속받고 파업을 끝낸다.중단됐던 생산라인도 빠르게 가동된다.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한밤의 인천공항이다.
 택시에서 여행 가방을 내려 끌며 어둑한 묵정 빌라 입구로 들어선다.일주일 만이다.아무리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이라 해도 정리해야 한다.하지만 베트남에서 정신없이 흘러갔던 긴장이 다 풀리지 않은 지금 상태로는 그냥 뻗어 잠들 것 같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환기되지 않은 묵직한 공기가 코앞을 맴돈다.현관에 들어가자 집 안에서 킬킬킬 웃는 소리가 들린다.남자 목소리다.나는 잠시 멈칫하며 깜깜한 집안을 경계한다.운동화도 벗지 않은 채 느릿느릿 거실 위로 올라서 벽에 난 전등 스위치를 올린다.시차를 두고 파리 같은 소음을 내더니 형광등이 힘없이 켜진다.양 끝이 새까맣게 변한 게 남자가 살았던 그대로다.이번에는 변기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누군가 들어와 있는 게 분명하다.나는 한걸음이면 되는 화장실 앞에 오른쪽 운동화 발끝부터 소리 없이 내려놓는다.꽉 닫혀있는 화장실 문손잡이를 꾹 잡고 형광등 같은 시차를 두고 문을 확 연다.역시나 화재의 역류처럼 밀려오는 역한 냄새에 고개를 돌린다.이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과 마주친다.움찔 한걸음 물러서며 화장실 불을 켠다.정면에 초췌한 사람이 서 있다.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내가 나를 보고 놀라다니.두 눈을 비빈다.두 개의 눈알이 뻑뻑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운동화를 벗어 놓고 정리되지 않은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한눈에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공간.누군가 숨어있을 곳이 없다.나는 1인용 매트리스 위에 쌓인 옷더미를 손으로 휘휘 젓는다.소심한 걱정처럼 이곳에 누가 들어와 있을 리 없다.나는 그대로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워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가전제품 중 유일하게 들인 중고 냉장고와 풀지 못한 상자 몇 개가 놓여있다.그리고 더 작은 방에 덩그러니 서 있는 아내의 가방.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이번에는 한 명의 목소리가 아니다.더 작은 방 쪽에서 나는 소리다.설마 죽은 아내가 영혼들을 끌고 나타난 건가.상관없다.아내가 그렇게 나타난다면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한다. 내 머리도 형광등처럼 까맣게 탄 것 같다.아내에게 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일어나 레인보우샤크가 유혹하던 거실로 향한다.아무것도 없다.수족관은 이 집의 옵션이 아니었다는 것을,나의 판타지가 수족관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뒤늦게 깨닫는다.집을 보던 그날 밤,붉은 지느러미 유혹에 넘어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의 경계를 판단할 이성이 흐릿해졌었다.이 집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은 건 화장실에서 눌러 붙은 남자의 담배 냄새와 2미터 길이의 네모난 수족관 자국이다.창밖의 야경도 그저 네모난 빌딩이 우후죽순 빛을 내는 흔한 광경일 뿐이다.나 같은 야근생활자에게 때론 지겹기도 한 풍경.
 나는 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어둠 속에서 아내의 물건이 담긴 가방을 우두커니 바라본다.어쩌자고 그 짐을 버리지 못한 채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내 등 뒤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크게 들린다.이번에는 여자다.소리의 근원을 찾는다.차가운 벽이다.차갑고 얇은 벽 너머다.차갑고 얇은 벽 너머 101호 TV 소리다.아니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위층 TV 소리 일 수도 있다.나는 다시 벽에 귀를 댄다.101호가 확실하다.혼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예능프로다.연예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그러자 벽이 소용없을 정도로 TV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볼륨을 줄여달라고 항의를 해야 할 판이지만 지금은 나도 혼자 산다는 생각에 괜히 프로그램 내용이 궁금해진다.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 그들의 토크를 들으며 웃는다.아내의 커다란 가방이 서 있는 더 작은 방에서 아내가 죽고 난 후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웃는다.눈을 감고 웃음 속에 빠진다.아내가 어떻게 웃었는지 떠올리며 웃는다.내가 뭐라 말하면 습관처럼 “미안”하고 말하며 샐쭉 웃던 아내…….
 아내가 죽던 날 아침에도 그랬다.
 옷장에서 검은색 싱글 모직 코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아내는 엷은 화장을 하며 스타일러에 있다고 했다.나는 스타일러 속에서 코트를 꺼냈다.에어시트 향이 묻어난 코트를 털어 입는데 두 번째 단추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덜렁거렸다.
 “넣을 때 단추 확인 안 했어?”
 아내는 단발 생머리 속에 감춘 귓불에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은 동그란 귀걸이를 끼우며 나를 봤다.아내의 대답이 느려지자 짜증이 났다.언젠가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아내는 뜻을 곱씹어보듯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하곤 했다.
 “다른 옷 입고 가.”
 난 그날 꼭 그 코트를 입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고 아내는 어쩐 일인지 내 코트를 붙잡았다.무표정하게 단추를 뜯어내 새로 달기 시작했다.대학병원에서 행정직원으로 근무하는 아내의 출근 시간도 빠듯한 걸 알고 있었지만,그때 내 머릿속에 아내는 없었다.나는 아내가 내민 코트를 입었다.두 번째 단추 구멍에 빨간 실이 도드라졌다.
 “너 생각이 있어? 세 개 단추 전부도 아니고 두 번째 단추만 빨간 실로?”
 아내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빡이던 아주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아내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샐쭉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미안.다시 달아줄까?”
 “됐어! 어쩐지 평소에 하지도 않는 바느질 한다 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핀잔을 주면서 세탁은 아내 담당,청소는 내 담당이라는 업무분담을 강조했다.아내는 웃었다.내 짜증이 화로 변해가도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변함없이 웃었다.뜻도 없는 괴성을 지르며 코트를 들고나온 뒤에야 자동차 키를 놓고 온 것을 알았다.겨우 잡고 탄 택시에서 스타일러 안에 옷을 넣어 둔 사람이 아내가 아닌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온 나였다는 것이 기억났다.하지만 그땐,그런 줄 알면서도 미안이라고 말하고 웃기만 했던 아내에게 짜증이 났다.내가 짜증을 낼수록 아내는 웃었고,아내가 말없이 웃을수록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눈을 뜬다.계단으로 떨어진 그 단추를 여태 찾지 않은 게 떠오른다.흔한 단추인데 뭘 찾아? 누가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벽을 타고 흐르던 목소리의 패턴이 순간순간 달라진다.리모컨을 쥔 101호 사람이 채널을 탐색하고 있다.한참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분절된 단어만 들리더니 전원이 꺼진다.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좀 더 작은 방에서 나온다.
 목이 마르다.냉장고를 열어보니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버려야 할 빈 생수병과 먹다 남은 생수병들이 섞여있다.생수병들을 모두 꺼내고 텅 비어버린 냉장고 플러그를 꽂는다.오랜만에 에너지를 얻은 냉장고가 윙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이제야 이 집에서도 소리 같은 소리가 생성된다.누군가 이 소리를 듣고 있겠지.모두의 청각이 예민해지는 짙은 밤이다.그 핑계로 나는 씻지도 않고 작은 방 매트리스에 누워 잠을 청한다.잠이 들 듯 말 듯 하다가 어이가 없어 피식거린다.겉으로 그렇게 단단해 보이는 빌라였는데 방음이 하나도 안 된다니.나는 부동산 중개인 최 실장과 여기 살았던 남자와 레인보우샤크에게 완전히 속은 것 같다.그리고 아내와 그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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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어로부터 몇몇 추가 스타일에 대한 코스팅 요청이 들어왔다.꼼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이미 다른 벤더를 마음에 둔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그래도 어쩔 수 없다.가능성이 피를 말리는 거다.우리가 제시한 가격 조건을 보고 바이어 마음이 바뀔 수 있다.그 아주 적은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어 사흘 내내 지루한 야근이 계속된다.원부자재는 바이어가 이미 지정한 노미 업체를 써야 했으니 다른 벤더들과 경쟁해서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공임 단가를 조정해야 한다.인건비를 무작정 낮추는 건 문제가 있다.또다시 파업이 발생하지 말란 법은 없다.실적이 중요했던 오 팀장과 몇 번이나 의견 충돌을 보이다가 결국 우리의 대화는 유치해진다.오규원, 사람들 봉제해서 한 달에 얼마 버는 줄 아냐? 김현준, 네가 언제부터 윤리적이었냐? 지금 여기서 그게 왜 나와? 팀원이면 팀장 말 좀 들어라.팀장 되니까 사람이 하찮아 보이지? 넌 뭐가 그렇게 꼬였냐? 그래,나 꼬였다.꼬면 너도 승진하던가.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난다.다음이 내가 대꾸할 순서였지만 말이 아닌 행동으로,가방을 들고나온다.정말 유치한 짓이라는 것을 사무실 문도 나서기 전에 알았지만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어차피 정상적인 퇴근 시간이다.
 무작정 걷다가 갈 곳이 집뿐이라는 걸 깨닫는다.버스는 만원이고 도로는 정체다.정류장에 내려 시간을 확인하니 이른 퇴근이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닌 것이 된다.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다 숨이 턱 막힐 때쯤 돌아본다.여름을 생각하자 벌써 아득해진다.집을 구할 때 저녁에 보면 안 된다고 충고한 오규원 말이 맞긴 한 것 같다.규원의 충고는 대체적으로 맞았지만 나는 몇 시간 전처럼 규원의 충고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현관문을 열자 TV 소리가 들린다.며칠 사이에 얼굴도 본 적 없는 101호 사람이 마치 나와 함께 사는 것 같다.괜히 조금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나 왔어. 오늘은 어떤 프로 보는데?” 라고 물어봐야 할 것 같다.그래서 집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벽에 귀를 댄다.소리로 프로그램 제목이나 출연진을 맞추는 재미가 있다.갑자기 볼륨이 줄어든다.문제를 어렵게 내려는 것인가? 미간에 주름까지 세우고 소리에 집중한다.왼쪽 귀와 왼쪽 볼,만약 문제가 더 어려워진다면 양손바닥까지 벽과 하나가 되어 진동을 느낀다.아,중저음에 발음이 정확하고 내용 전달력이 좋은 여자의 목소리.정답 9시 뉴스! 딩동댕.나는 우쭐하며 일어나서는 아내의 가방을 보고는 침착해진다.미안,아내처럼 말하고 싶은데 쉽게 나오지 않는다.내 등 뒤에서 키득키득 거리는 소리가 울린다.벽 속에 누가 숨어 이런 나를 지켜보는 것 같다. 나는 서둘러 더 작은 방을 나온다.
 작은 방 매트리스에 누워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귀는 예민하게 열린다.누군가 늦은 저녁을 만드는지 어디선가 칼질하는 소리가 짧게 났다 사라진다.또 어느 집에서 늦은 밤 돌리는 청소기는 성능이 그리 좋지 못한 듯 소리에 힘이 없다.방바닥에서 가끔 낑낑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지하 세입자 중 누군가는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밖에서는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고양이가 가늘게 운다.은신처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집에서 나는 항상 사람들 틈에 있다.
 나는 거실로 나가 수족관 자리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통유리 너머 지루한 빌딩 야경을 멍하니 바라본다.밤이 깊어져도 소음은 사라지지 않는다.거실 천장 어디쯤에서는 살을 부딪치며 내는 비음과 힘을 쏟는 에너지가 교차해서 들리다가 사라진다.이내 한쪽에서는 코를 골고 한쪽에서는 이를 간다.그들의 섹스가 수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걸,그들에게 요란한 잠버릇이 있다는 걸 잠을 자지 않는 모두가 안다.그러니까 묵정 빌라 이곳은 세입자들의 사생활이 소리로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었고,모두가 암묵적으로 서로의 사생활을 모른척하며 지내는 곳이었다.
 작년,초가을부터 시작된 그녀와의 연애도 그랬다.모두가 나와 그녀의 불륜을 알아챘으면서도 모른척했다.그때 만약 규원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그때 내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오직 그녀의 귓속말뿐이었다.
 남편과 별거 중이었던 그녀의 오피스텔이 우리의 밀회 장소였다.퇴근하면 종종 그녀의 오피스텔을 찾았다.그럴 때마다 아내에게는 야근을 핑계 삼았다.아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야근은 내가 밥 먹듯 하는 일이었고,아내도 퇴근 후 대학원을 다니느라 늘 바쁜 편이었다.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아내에게 잘한다는 것은 그냥 원래 그런 남자들 얘기다.아내에게 더 무관심해지고 ‘단추’ 같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났다.그때 내 머릿속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라 아내에게 신경 쓸 에너지가 없었다.가끔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은 괜히 쓰레기봉투를 들고나와 택시를 타고 그녀의 오피스텔을 찾곤 했다.날이 추워져도 아내의 눈치를 피해 집에서 입는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갔다.그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하면 추위에 빨개진 살을 비비며 오들오들 떨었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쉽게 안길 수 있어 좋았다.나와 그녀는 그렇게 비밀스럽게 만났고 사내에서 그 비밀을 즐겼다.
 비밀연애를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같이 점심을 먹던 규원이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디자인팀 윤 대리,맞지?”
 나는 밥을 넘기듯 자연스럽게 넘겼다.
 “뭐가?”
 “나한테까지 이러기냐? 솔직하게 얘기해봐.”
 나는 규원을 보고 어이없다며 웃었다.
 “밥이나 먹어.”
 “너 설마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고,규원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너도 알지? 누구 눈은 현미경 수준이고 어떤 놈 귀는 또 얼마나 예민하고 어떤 새끼 입은 얼마나 가벼운지.조직이 운영되는 게 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회사에서,너랑 윤 대리 불륜이 비밀이 아니라는 거 너만 모른다고 새꺄.”
 나만 모른다면 설마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건가.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불륜 아니다.별거 중이고 곧 정리된다고 했어.”
 규원의 눈동자가 수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젓가락질도 멈췄다.허! 하고 짧게 웃음을 쳤다.
 “넌? 너도 정리할 거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럴 거였으면 진즉에 제수씨가 이혼하자고 할 때 하지 그랬어?”
 규원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나는 오규원에게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놨고,결국 말하지 않은 것도 들키고 말았다.대답을 머뭇거리는 내게 규원은 그녀와 정리할 것을 충고했다.나도 규원에게 충고를 잊지 않았다.꽉 막힌 자식, 내 사생활에 참견하지 마.규원은 순간 웃었다.짧았던 웃음처럼 알았다고 짧게 답했다.규원은 내 말을 너무 잘 들었다.아니 본인의 뱉은 말을 잘 지켰다.내 사생활에 참견을 접은 규원은 빠르게 팀장으로 승진했고 난 대리 말호봉을 지나 5호봉에 머물렀다.어쨌든 규원의 충고 이후 회사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확연히 잘 들리긴 했다.하지만 그들이 모른척했던 것처럼 나도 모른척했다.그녀가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에.그녀는 열정만큼 차갑도록 냉정한 면이 있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요란하게 돌아간다.딱딱한 거실 벽에 오래 기대어 앉아있던 등이 차갑다.갑자기 귓불도 서늘해지고 귓속도 간지럽다.내가 앉은 자리,귀의 높이가 딱 레인보우샤크가 꼬리를 치던 높이만 하다.행여 그 녀석이 벽 속에 숨어있다 꼬리를 치는 것이라면,혹시라도 사라질까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역시 레인보우샤크는 없다.하지만 그 녀석이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만 같다.예를 들어 아내의 가방 같은 곳에.
 나는 더 작은 방에 들어가 레인보우샤크를 찾는다는 핑계로 아내의 가방을 연다.아내가 죽고 나서 두 번째다.레인보우샤크는 보이지 않는다.대신 아내의 옷과 신발,화장품,책 몇 권과 아내가 아끼는 4호 크기 판화 한 점이 들어있다.아내는 이렇게 나를 떠날 생각이었다.그리고 영원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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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5시 30분.쏴하는 소리에 잠을 깬다.창밖을 보니 비는 오지 않는다.또 소리의 근원을 찾아 매트리스에 누운 채 귀를 연다.벽을 타고 넘나드는 물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돌아간다.세탁기,통돌이 세탁기가 분명하다.덜커덕덜커덕 규칙적으로 통이 돌아간다.103호다.
 103호는 보통 늦은 밤 아니면 새벽 1시경에 세탁기를 돌렸다.그것도 매일.
 며칠 전,야근 후 귀가했을 때 세탁기 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참을 수 없는 생활 소음.다들 견디고 있다고 해도 때론 견딜 수 없는 날도 있는 법이다. 새벽 1시 50분.나는 결국 103호 초인종을 눌렀다.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103호 문은 열리지 않았다.나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문이 열렸다.103호가 아닌 101호였다.살짝 열린 문틈에서 조용히 살자고 소리치는 허스키한 남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쾅 닫히는 문안으로 사라졌다.얼굴도 안 보여주고 사라진 101호 남자.나는 괜히 섭섭했다.내가 101호 TV 소리를 얼마나 참으며 같이 즐겨줬는데.나는 101호 현관문 앞에 주먹을 댔다가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벽에 귀를 댔다.다 돌아간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탁탁 터는 소리가 들렸다.역시 사람이 있었다.그날 이후,103호는 이른 아침에 세탁기를 돌렸다.
 이번에는 졸졸졸 물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이제 겨우 세탁 한 번이 됐을 것이다.103호가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 이유는 뭘까? 아내와 같은 이유일까? 아니다.그건 아내만이 가능하다.
 아내도 언젠가부터 매일 이른 아침마다 세탁기를 돌렸다.나는 아침부터 소란스럽다고 핀잔을 줬지만 아내는 뜸을 들이다 “미안” 하고 말했다.그 습관은 멈추지 않았다.때 이른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세탁기를 돌렸다가 하수관이 얼어버렸다.아래층에서 물이 역류한다고 난리가 났었다.그래도 아내의 아침 세탁은 멈추지 않았다.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아내를 달랬다.
 “너도 출근 준비하려면 바쁘잖아.한꺼번에 몰아서 세탁하자.내가 해줄게.”
 달랬다고 하지만 사실 목소리에서 짜증과 화를 숨길 수 없었다.
 “미안.근데 당신 요즘 바쁘잖아.내가 그냥 할게.”
 아내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쿵쿵쿵 구두 끝을 내려치며 혼자 출근했다.그런 날은 쓸데없이 미안해져 그녀를 만나지 않고 퇴근해 그동안 미뤘던 청소를 하곤 했다. 그러다 결국은 꽉 차지도 않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그녀를 만나러 달려갔다.쓰레기 버리러 갔던 내가 늦게 들어와도 아내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아내는 그저,밖은 추워? 라고 무심히 묻기도 했지만 보통은 서재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나는 피곤해서 먼저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이른 아침이면 아내는 어김없이 세탁기를 돌렸다.
 아내가 죽던 날 아침에도 아내는 세탁기부터 돌렸다.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탁기 안에는 꺼내지 못한 빨래가 덩어리로 뭉쳐진 채 말라 있었다.나는 빨래를 꺼내 하나씩 떼어냈다.쭈글쭈글 구겨진 빨래들은 모두 내 것이거나 내가 사용했던 것들이었다.속옷,양말,와이셔츠,반바지,티셔츠,수건,또 수건.그제야 아내가 아침마다 빨래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시간을 되돌려봤다.10월 말? 아니면 11월 중순부터였나? 어쨌든 나와 그녀의 비밀 연애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장례식장에서도 견뎠던 내가 빨래에 무너졌다.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오히려 아내는 가끔 내게 “미안”이라고 말했다.샐쭉거리며 웃던 아내가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장례식장에서 아내가 병원을 퇴사했다는 걸 알았고 세탁기 빨래보다 뒤늦게 서재에서 아내의 커다란 가방을 발견했다.나를 만나러 오지 않고 바로 떠났다면 아내는 죽지 않았을까?
 103호 세탁기가 세차게 돌아가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빙글빙글.내가 세탁기 안에 있는 것 같다.
*
 구조조정이 시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어느 부서가 먼저 될지 알지만 다들 쉬쉬한다.팀원들은 불안해한다.이미 오더가 줄줄이 취소됐고 해외 매출실적도 좋지 않다.오 팀장은 우리 팀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모르고 나가는 것보다 마음의 준비라도 단단히 하고 있으라는 거다.순간 오 팀장과 눈이 마주친다.첫 번째 대상이 나라는 건가? 그렇다면 오 팀장 성격상 벌써 말해줬을 텐데.아니다.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최근 우리 둘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해외 영업팀에서 내 자리는 항상 위태로웠으니까.그래도 나는 일이 많았고 항상 야근이었다.
 묵정 빌라로 들어가다가 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는 구멍가게에서 오래된 맥주 세 캔을 산다.볼 때마다 잠을 자던 할머니가 나를 못 보던 사람이라고 자세히 살핀다.이사 왔어? 네.묵정 빌라? 네.살만해? 네.비닐 줘? 네.
 나는 할머니가 내민 검은 비닐에 맥주 캔을 담고,할머니는 두껍게 마른 손가락으로 계산된 잔돈에서 추가로 비닐 값을 뺀다.
 “농사도 못 지어서 그냥 버려둔 묵정밭이었는데 집 짓고 살만해졌지.”
 “네?”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몰라.”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그냥 늘 혼자였던 할머니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이다.나는 할머니의 혼잣말을 뒤로한 채 구멍가게를 나온다.
 묵정 빌라 현관에 서자 지하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자 갑자기 개소리가 커진다.나는 B02호 현관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는다.안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문 앞으로 다가온다.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온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매트리스에 앉아 손안을 펼친다.드디어 찾았다.아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달아줬던 단추.흔하디흔한 까만 단추에 달린 빨간 실 꼭지가 먼지와 뒤엉켰다.실을 떼 낸 단추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미지근한 맥주를 마신다.천장이 쿵쿵 울린다.4D 상영관처럼 진동이 벽을 타고 매트리스 위까지 전해온다. 이번에는 찰진 욕에 무너지고 깨진다.나는 맥주를 마시며 그들의 싸움을 청취한다.헤어져! 그래 헤어져!
 나는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러지 못했다.남편과 합친다는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내가 뭐라고 하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아내처럼 가만히 듣던 그녀가 짧게 말하고 떠났다.
 “미안.”
 헤어졌다고 술에 취할 생각은 없었다.뭐 다들 그렇겠지만.꼬부라진 혀로 오규원에게 연락했지만 그 자식은 나오지 않았다.마침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기다려.아내는 짧게 말하고 끊었다.나는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술이 더 들어가자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택시를 잡기 위해 휘청거리며 거리로 뛰어들었다.몇 번이나 욕 세례를 받고도 멈추지 않았다.다른 취객들과 경쟁하며 내 앞을 지나치는 빈 택시를 지그재그로 쫓았다.드디어 택시 한 대를 온몸으로 잡았다.당신 죽고 싶어! 씨,죽고 싶다! 그녀에 대한 집착이었고 괜한 오기였다.그렇게 멈춘 택시에 오르는데 뒤에서 큰소리가 났다.돌아봤다.멀었지만 너무 눈부셔서 눈을 감은 채 기사에게 그녀의 오피스텔을 말했다.택시는 빠르게 달렸다.
 그녀가 이미 떠나버린 텅 빈 오피스텔에서 목이 말라 깼을 때 수십 개의 부재중 통화를 확인했다.아내가 근무했던 대학 병원으로 비틀거리며 달려갔다.좁은 침대 위에 하얀 천을 덮고 누운 아내와 마주하자 속이 울렁거렸다.결국 부서진 아내 앞에서 속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소화되지 않은 것들이 액체 괴물처럼 넓게 퍼졌다.정신이 들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떠나서 괴롭다고 징징거리던 내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그저 내 몸에서 나는 심한 악취에 인상이 써졌다.나는 죽은 아내 대신 가느다란 침대 기둥을 붙잡았다.차가웠다.너무 차가워서 놓을 수가 없었다.스테인리스 침대 기둥에 일그러진 붉은 괴물이 찍혀가도록.
 경찰이 아내의 사고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계속 싱글 모직 코트의 두 번째 단추만 매만지며 딴짓을 했다.결국 경찰이 다 이해했냐고 물었다.나는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을 깜박였다.아내는 거리의 취객을 피하려고 방향을 틀다가 가로수를 들이박고 죽었다.아내가 나와 같은 놈 때문에 죽은 것이냐고 경찰에게 묻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세 번째 맥주 캔을 다 비울 때 위층에서 싸우던 소리도 멈춘다.아주 잠깐의 정적.이내 흐느끼는 소리,코 푸는 소리,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멈췄던 TV 소리,끙끙거리는 반려견 소리에 리듬을 맞춘 빠른 비트의 음악이 신나게 흐른다.다들 누군가의 싸움을 청취하고 있었다.저들에게 나의 사생활이 얼마나 드러나 있을지 궁금하다.가능하다면 들키고 싶지 않다.아무래도 이번 주말에는 아내의 물건을 정리해야겠다.아내가 마지막 달아주었던 단추도 함께.손에서 굴리던 단추를 들고 일어난다.
 아내의 커다란 가방에 들어가도 티도 안 날 단추를 밀어 넣고 고민한다.아주 잠깐.그리고 결정한다.아내의 물건 하나쯤은 남겨놓고 싶다.아내가 유난히 아꼈던 판화 액자를 꺼낸다.판화지만 단 하나뿐인 작품이라고 했다.진짜 그런가? 푸른 색감이 가득한 여자의 실루엣.마티스의 작품을 모작한 판화 같기도 하다.그래도 나쁘지 않다.무엇보다 아내가 좋아했던 푸른색 실루엣이 내 마음에도 든다.수족관 대신 걸어두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판화를 들고 거실 벽에 위치를 맞춰본다.고리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액자 뒤를 살핀다.날짜가 적혀있다.작년 아내의 생일날이다.누군가 아내에게 남긴 짧은 글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누구나 알 수 있는 단순한 문장인데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글을 남긴 사람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사랑했던 건지,아내도 동시에 사랑했던 건지 알 수 없다.아내가 “미안”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작년 10월? 9월? 아니 더 오래전이었을 텐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확실한 건,지금 아내는 떠났고 아내의 비밀은 푸른 여자의 실루엣이 담긴 판화 뒷면에 일방적인 흔적으로 남았다.
 아무도 몰랐던 아내가 죽은 지 139일째다.아내가 죽은 후에야 숫자를 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나는 계속 숫자를 센다.여전히 아내에게 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대신 아내가 내게 “미안”이라고 말하던 의미를 뻐끔거리며 네모난 수족관 자리로 내가 들어간다.
 통유리에 빛을 잃은 레인보우샤크 한 마리가 나타난다.종족을 공격하다 오히려 공격당한 레인보우샤크가 은신처를 찾아 헤맨다.101호가 켜둔 TV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203호 화장실 변기 물이 몇 번이나 흘러가고,202호 짧은 섹스도 눈 깜짝할 사이 지난다.103호 세탁기가 소용돌이치면 지하에서는 개들이 짖고,거처를 알 수 없는 고양이가 울어댄다.때마침 중고 냉장고 모터 소리도 요란하게 돌아가지만 유독 나 혼자 소리를 내지 못한다.모두의 귀가 예민하게 열려있는 묵정 빌라 이곳은 나의 은신처가 될 수 없다.
 아내가 죽은 지 139일째 되는 날, 나는 진짜 숨어있기 좋은 곳을 찾기로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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